비서울 인터뷰

같은 분야의 사람들 눈에 

자주 띄어야 할 텐데, 광명으로 완전히 

내려가게 될 때의 불안감이 있다.

나는 1998년생,
광명과 서울을 오가며 사는 연희자 오정민입니다.


오정민

광명 거주 연희자

중학생때, 가야금 동아리에 들어가면 음악 수행평가 점수를 'A+' 준다 해서 국악을 시작했어요.

그런데 제 성향과 잘 맞더라고요. 어릴 때 부터 기타나 피아노 연주를 즐겼거든요. 전통예고 진학 준비를 시작하고 가야금 대회까지 나가게 되었는데 대회장에서 태어나 처음으로 상모 돌리는 걸 본 거죠. 첫 눈에 반했어요.


가야금 분야에서 수상도 했지만 이미 가야금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어요. 그런데 상모로는 예고를 갈 수가 없더라고요. 해서 광명에 있는 ‘충현고등학교’에 진학했어요. 광명농악을 가르치는, 말하자면 특성화 학교 같은 곳이었어요. 


광명농악은 광명지역의 시 문화재인데 사실 사람들이 잘 몰라요. 보유자 선생님과 이수자 선생님이 학교로 출강하셔서 광명농악을 알려주셨죠. 헌데 광명 농악만으로 원하는 대학을 준비하기 어렵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학교 수업 외에 개인 선생님을 구해 레슨을 받았고, 그러면서 지금에 이르렀죠.

서울에 있는 레슨 선생님과 입시 준비를 했어요.

일주일에 한두 번씩 광명에서 석관동까지 왔다 갔다 했어요. 한예종 출신 선생님을 찾아갔거든요. 다행히 담임 선생님께서 편의를 봐주셔서 점심 때까지 학교 수업을 듣고 그 후에는 레슨에 갈 수 있도록 배려해 주셨죠. 제가 재수할 때는 매일매일 광명에서 서울을 오갔어요. 한예종에 들어가고는 학교 근처, 돌곶이역 쪽에 살면서 광명 본가와 서울을 오가며 지냈고요. 이제 6년쯤 됐네요. 

동네에 마땅한 연습실이 없어서 무작정 주민센터에 찾아갔어요.

고등학생 때는 광명문화원 건물 지하에 광명농악보존회가 상주하고 있어서 늘 그곳에서 연습했어요. 단체를 나오고 나서는 학교 강당에서 연습했고요. 당시 선생님들이 정말 편의를 많이 봐주셨거든요. 


재수시절에는 고등학교 강당을 쓸 수가 없으니 무작정 학운동 주민센터에 찾아갔어요. 주민센터마다 사물놀이 수업이나 국악 연습 프로그램이 있잖아요. 그러니 연습실도 있겠다 싶어서 어머니와 함께 주민센터로 간 거죠. 연습실을 써도 되겠냐고 여쭤봤는데 사실 처음에는 퍽 안 좋아하셨어요. 그럼에도 구구절절 사정을 설명하니까 일단 알겠다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주민센터에서 연습하기 시작했어요. 밤 10시까지 연습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셨기에 아침 일찍부터 연습할 때도 많았죠. 대학에 합격하고 정말 감사한 마음에 선물 사가지고 찾아 뵈었던 기억이 있어요.


광명에도 돈을 내고 이용할 수 있는 연습실이 있기는 하지만 연희연습은 한두 시간으로 끝나지 않으니까요. 그 때는 혼자서 하루 여섯 시간씩 연습했거든요. 그 당시 광명 사거리 쪽 연습실이 시간당 1만 원이었어요. 많이 비쌌죠. 못해도 하루에 6만원씩 나가는 셈이니까요. 아직도 주민센터분들께 감사한 마음이에요.

대학원을 마치면 광명으로 완전히 이주할 생각을 하고 있어요.

지금이 대학원 마지막 학기인데 졸업생은 학교 연습실을 쓸 수 없어요. 


서울에 연습실을 구하려고 알아봤는데 너무 비싸더라고요. 연희라는 장르에 맞는 조건을 갖춘 연습실 찾기도 어렵고요. 상모를 돌리려면 천장도 높아야 하고 방음도 확실해야 해서 이 같은 필요를 다 따졌을 때 너무 많은 예산이 들어요. 저희 아버지께서 화가세요. 광명의 집이 단독주택인데 옆에 아버지 작업실이 딸려 있어요. 거기 방 하나를 방음 처리해서 연습실로 사용할 구상을 하는 중이에요. 

학교를 졸업하고 연습실도 광명으로 옮겼을 때를 상상하면, 불안감이 생기기는 해요.

계속 사람들 눈에 띄어야 ‘얘가 아직 활동을 하고 있구나’ 하고 생각한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아요. 석관동에 있으면 새벽에 연습실을 가도 항상 보이는 친구들이 있고, 그 친구들과 술집에 갈라 치면 늘 마주치는 선배들을 보면서 ‘저 분은 여전히 활동하고 계시는 구나.’ 이렇게 생각하게 되거든요. 그러다가 그 선배의 공연도 보러 가게 되고요. 이런 식으로 사람들 눈에 계속 띄어야 어느 공연에 객원연주자가 필요할 때, 내게 연락이 닿게 되겠죠. 내가 사람들 시야에서 멀어지면 다른 사람한테 연락이 갈 확률이 높을 거고요. 

연희 팀 대부분이 서울에서 활동하고 있어요.

그래서 혼자만 따로 떨어지는 게 걱정될 수밖에 없죠. 


연희자들이 몰려 있는 현장에 가깝게 있는 게 중요하다는 생각도 들지만 현실적인 것들을 고려하면 광명으로 내려가는 것이 최선인 것 같아요. 졸업하신 선배나 주변 친구들의 상황을 살펴보면 지방에서 올라왔다 하더라도 대부분은 계속 서울에서 지내요. 집이 시흥이거나 광명이라면, 서울의 외곽이지만 서울에서 활동하기 불편하지 않은 거리인 경우에는 본가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고요. 활동하다가 아예 그만두는 사람도 있고 자기 지역으로 돌아가서 지역 농악을 하는 경우도 있죠. 지방에서 올라온 친구들은 웬만하면 본가가 있는 지역으로 안 내려가려고 하더라고요. 같은 팀 언니가 대구 출신이어서 왜 그러냐고 물어봤는데 ‘지방 사람들은 대개 그럴 거다. 한 번 상경했으면 다시 내려 갈 생각은 좀처럼 하지 않는다.’는 얘기를 했어요.

아무래도 서울에서 활동을 할 때 알려질 수 있는 기회가 많으니까요. 


‘21c한국음악프로젝트’라든지 ‘청춘만발’, ‘청춘열전’, 이런 큰 프로젝트들이 다 서울에서 진행되다 보니 그런 거겠죠. 청춘마이크 사업만 봤을 때도 서울권 경쟁률이 어마어마해요. 

하지만 광명 지역에서 하게 될 활동을 기대하는 마음 또한 커요.

광명에서 활동을 더 많이 하고 싶어요. 연습실을 광명으로 옮기면 경기도 사업자도 낼 생각이고요. 본가가 광명이어서 그런지 애착이 가요. 개인의 레파토리를 늘려 가고 싶다는 목표를 놓지 않으면서 화가이신 아버지와 저의 전공을 둘 다 살린 작품을 함께 만들어 보고 싶어요. 


언젠가 광명이라는 지역을 모티브로 작품을 만들게 된다면 내가 사는 동네인 광명과 대단히 도시화된 광명의 특정 지역들, 이 두 장소의 대비를 표현해 보고 싶어요. 그러면서도 나의 동네를 더 풍부하게 표현하고 싶죠. 저는 우리 동네를 시골이라고 생각해요. 광명에서 얼마 남지 않은 미개발 지역이기도 하고요. 개발의 마지막 마지노선으로 그린벨트가 풀린 지 얼마되지 않았어요. 대도시의 모습을 하고 있는 철산과 대비되는 부분을 표현하는 동시에 어떤 아쉬운 마음도 담아 보고 싶어요. 

작년에 고등학교 졸업 이후로는 처음으로 광명에서 공연을 했어요.

2022년에 광명에서 체육대회가 크게 열렸거든요. 광명시의 동 주민센터별로 다 참여할 정도로요. 어머니의 지인이 주민센터 대장 같은 분이신데 제게 체육대회에 와서 판굿과 연희공연을 해달라고 부탁하셨어요. 학교 선후배를 이끌고 광명으로 갔죠. 

대학 들어가고 나서 광명에서 공연한 건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고등학생시절, 광명농악보존회 단체에 소속되어 올렸던 공연과는 느낌이 많이 다르더라고요. 사실 단체 입장에서 보면 광명농악을 배신하고 나온 배신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거든요. 그래서 살짝 눈치가 보인 것도 사실이예요. 고등학생때는 배우는 어린 학생 입장에서 아무것도 모르고 공연을 했었다면 그때는 대학원생으로서 전공자 동기들을 이끌고 내가 사는 지역으로 돌아와 공연을 올린다는 것이 꽤 뿌듯했어요. 동시에 굉장히 복합적인 감정이 들더라고요. 만감이 교차한달까요.

전통 예술 분야는 살짝 폐쇄적인 성격이 있는 것 같아요.

광명농악만의 이야기는 아니에요. 다른 선생님께 배움을 구한다고 하면 사람을 뺏긴다고 생각하시는 경우가 있어요. 그래서 광명농악을 하는 단체에 속해 있을 때, 대학을 한예종으로 선택하고 외부에서 레슨을 받고 싶다 말씀드리니 선생님들이 별로 좋아하지 않으셨어요. 굳이 왜 한예종을 가고 싶어하냐고 말리기도 하셨죠. 광명농악 출신 선생님들이 졸업하신 특정 대학들이 있거든요. 거기로 가길 바라신 거죠. 


그런데 전 꼭 한예종에 가고 싶었어요.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는데 우선 김덕수 (장고 연주가)라는 사람이 한예종에만 출강을 했고, 그 사람한테 꼭 배워야겠다 싶었어요. 사물놀이를 하려는데 창시자에게 배워야 의미가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당시의 저는 단체를 나올 생각은 없었어요. 단체에 속해 있으면서 외부 레슨도 받아 보면 좋겠다는 판단이었는데, 선생님들의 반대의견을 접하고 보니 내가 원하는 것과 단체가 원하는 것을 동시에 할 수는 없겠더라고요. 그만 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죠. 

대학에서 만난 인연과 함께 팀을 만들었어요. 

장구소리, ‘따구궁 따궁 따구궁 따’ 할 때 구궁. 그 소리를 따서 만든 이름 ‘퍼커싱 연희듀오 구궁’이라는 팀이에요. 

재수 끝에 한예종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학교에서 친해진 꽹과리 전공자 언니와 저, 둘이 한 팀이고요. 꽹과리 ‘부포놀이’를 여자 둘이서 공연하면서 동선도 색다르게 짜보면 예쁘겠다 싶었죠. 저희는 100% 창작 공연을 하는데 전통연희를 그대로 계승한 공연은 할 수 없는 상황이기도 해요. 사물놀이를 하려고 해도 4명이 필요하니까요. 


한예종에 ‘케이아츠 업로드’라는 사업이 있어요. 

단계별로 지원사업이 나뉘어 있고 지원해주는 금액과 조건도 단계별로 달라요. 우리 팀은 제일 밑 단계부터 차근차근 지원을 받아 올해에는 최종 단계 바로 아래 지원사업에 선정이 되었어요. 얼마전에 공연을 마쳤죠. 첫 단계에서는 쇼케이스를 해도 되고 공연을 하거나 영상을 제출해도 된다는 자유로운 조건이고 그 윗 단계는 쇼케이스는 무조건 해야 된다, 그 위 단계에서는 공연을 해서 팜플렛 제출이 필수다. 이렇게 조건이 차별화되어 있어요.

12월에 공연을 올릴 작품은 서울문화재단의 지원사업이지만 '경기 프로젝트'라는 주제를 잡았어요.

경기도의 도 문화재로 지정된 것들을 활용해 볼 생각이에요. 연희는 탈춤, 풍물, 무속 등 굉장히 다양한 것들을 아우르거든요. 그 요소를 살리면서 동시에 지역색을 녹아낸 공연을 만들려고요. 경기도의 양주별산대 탈춤, 경기 농악이면 광명농악, 평택농악, 경기도당굿 등을 염두에 두고 있어요.


학교의 지원사업으로 팀이 시작되었으니 이제 활동영역을 외부로 서서히 확장하려고 노력 중이에요. ‘청춘마이크’라는 사업을 진행중인데요. 청춘마이크는 같은 팀 언니 고향이 대구라 경상권으로 지원 했어요. ‘비나리(*사물의 가락 위에 축원과 고사, 덕담의 내용을 담은 노래를 얹어 부르는 것)’를 창작한 곡이나 꽹과리 두 개로 ‘짝두름(*상쇠와 부쇠가 서로 번갈아가면서 꽹과리를 연주하는 가락)’연주를 주고받는 형식의 작품을 하기도 해요. 안동에서도 공연을 했고 다음 달엔 부산으로 가요. 

생계 유지는 여전히 고전 중이랄까요.

육군 사관학교에 수요일마다 문화체육 수업이 있어요. 그 수업에 출강한 지 2년 정도 되었네요. 동대문 복지관이나 초등학교 수업을 진행하기도 하고요. 그러다 보니 제가 가르치는 사람들의 연령대가 너무 다양한 거죠. 초등학생부터 군인, 할머니 할아버지까지. 전 연령을 커버하기도 힘들고 세대별로 수업 준비를 달리 해야 하는 일도 만만치 않아서 육군사관학교 수업 빼고는 다 정리했어요. 

나의 하루는 이래요.

웬만하면 9시 전에 일어나요. 눈 뜨면 간단하게 아침식사를 하고 운동을 가는데 제가 헬스를 좋아하거든요. 열심히 2시간 정도 운동하고 집에서 점심을 먹어요. 이후엔 수업에 가거나 개인연습을 하죠. 중요한 공연이나 대회를 준비하는 기간에는 4시간, 아닐 때는 2시간 정도 하고요. 


그러다 보면 오후 6시 정도 되는데 그 후로는 자유로워요. 제가 요리하는 걸 좋아해서 저녁을 해 먹죠. 에너지가 많이 남아 있다면 곡을 쓸 때도 있고 서점이나 도서관에서 책을 읽기도 해요. 친구들을 만날 때도 있었는데 요즘은 다들 졸업해서 거의 집에서 놀거나 산책을 하며 저녁시간을 보내요. 


자기 전에 무조건 일기를 써요. 간단한 스트레칭도 하고요. 

마치 이상향 같은, 나의 예술로 꾸는 꿈이 있어요.

요즘 꽂힌 주제가 있어요. 음악을 들었을 때, 그 음악과 더불어 이미지가 상상되는 음악을 하고 싶어요. 음악을 귀로 듣지만 이것이 눈으로 보인다면 어떨까 하는 고민에 빠져 있죠. 즉흥 연주를 할 때에도 배경의 이미지를 상상하면서 공연을 해요. 그런 과정을 실제로 구현해서 아버지의 그림을 봤을 때 이것이 음악으로 들리면 어떨까 하는 상상의 나래를 펼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