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울 인터뷰

지역의 청년예술가?,

난 그저 예쑬을 할 뿐이다.

나는 1996년생,
부천에 사는 작가 김일경입니다.


김일경

부천 거주 작가

연극을 배웠어요. 전공은 연기였고요.

2학년 때까지 연기를 하다가 연출로 전향했는데 연출작업이 저와 더 잘 맞는 일이었어요. 


그래서 졸업때까지 쭉 연출을 공부를 했는데, 코로나가 터지는 바람에 연극으로는 밥벌이를 못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당시의 저는 의사소통 기술이 부족해서 내가 상상하는 걸 배우들이 표현해줘야만 하는 작업을 하고 있는데 그 커뮤니케이션 과정에 굉장히 지쳐 있었어요. 창작 욕구는 있지만 소통을 거쳐 함께 무언가를 만드는 과정이 힘들어진 거죠. 그래서 글을 쓰기 시작했어요. 2020년 1월이었죠.


에세이로 시작해서 희곡, 시나리오, 단편소설 등을 닥치는 대로 쓰기 시작하면서 인스타그램에 올리기도 하고 실제 활동도 했어요. 연극도 하고, 연극이 베이스가 되는 글이나 소설, 에세이를 쓰는 그런 작업을 해요. 동시에 회사원이기도 하고요.

코로나 시기에 집 밖으로 나가지도 않고, 할 게 없으니 온종일 글만 쓴 거예요.

저는 코로나에 걸리면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했던 터라 외출을 잘 안 했어요. 


여러모로 세상이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느껴졌고, 사람들도 그렇고요. 세상이 암울해 보이고 제 자신도 비전이 없는 상황이었거든요. 수업도 못 나가고 연극도 못 올리는, 나를 압박하는 규제와 제한들이 많았기 때문에 오히려 계속해서 글감이 생긴 것 같아요. 


1년 내내 집에 틀어박혀 에세이만 약 100편을 썼어요. 100편이라고 해봐야 편당 3천 자 정도밖에 안 되지만요. 이 글들을 모아 첫 책을 내게 되었는데 20대 초반부터 독서 모임을 통해 만난 분들 중, 북 디자이너님과 몇몇 분들이 출판을 해 보자고 제안해 주신 덕분이에요. ‘까짓 거 만들어보자, 이걸 기부 프로젝트로 해보자’ 해서 무사히 책이 나왔고 기부까지 이어졌어요. 


요즘은 주로 희곡을 쓰고 있어요. 전부터 희곡을 쓰고 싶다는 생각은 있었는데 재료가 없었거든요. 

그러다 최근에 재밌는 소스가 떠올라 머리속으로 준비하는 게 있어요.

글 쓸 때는 꽤 예민해져서 제가 만족스러워 하는 조건 중 하나라도 어긋나면 글이 잘 안 써져요.

그래서 주로 집에서 작업을 하죠. 


카페 같은 곳은 은근히 또 안 가고요. 집중이 잘 안되더라고요. 가령 카페에 있을 때 커피 그라인더 소리, 믹서기 소음이 방해가 돼요. 노이즈 캔슬링 기능이 있는 이어폰을 끼지만 조금이라도 소음이 스미면 그때부터 글 쓰는 리듬이 깨지는 거죠. 


집에서도 정확히 제 책상이어야 하고 마실 것을 준비해야 하고 또 불을 다 끄고 책상 뒤편에 있는 무드등을 켜야 해요. 그러면 어두운 웜톤의 환경이 완성되죠. 주로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2번 1악장, 조성진이 연주한 플레이리스트를 틀어요. 약 4시간짜리 플레이리스트라 글 쓰는 시간으로 설정하기 딱 좋거든요. 이 곡은 점점 고조가 되다가 마지막에 팡 하고 터지는 황홀한 부분이 있어요. 어떤 카타르시스가 발생하는 순간, 그날의 글쓰기가 끝나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정식 교과과정으로 연극이 있었어요.

인문계 고등학교였는데도 전교생이 연극을 배워야 하는 그런 실험 학교였죠. 


2학년 말에 ‘리투아니아’라는 연극을 올리게 되었고, 저는 거기에서 아들 역을 맡았어요. 사실 공부도 안 하고 맨날 PC방 가고 축구하고 노는 거 좋아하는 학생이었는데 그 연극을 준비하면서 처음으로 무언가에 진지하게 임한다는 마음을 알았어요. 이 길로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입시를 알아봤는데 연기 입시 학원비가 너무 비싸더라고요. 학교 연극 선생님께 ‘제가 연기를 하고 싶은데 돈은 없고 어떻게 해야 합니까?’ 여쭤보니 본인이 부천시 청소년 극단을 운영하고 있는데 거기에 적은 돈을 내고 들어와서 본인 서포트를 좀 해주면 가르침을 주겠다. 이렇게 된 거죠.


그렇게 부천시 청소년 극단에 들어가 지역 행사의 뮤지컬이나 갈라 쇼에 배우로 출연했어요. 입시 연기를 배우는 학원비는 약 30만 원이었어요. 그 금액을 내면서 지역의 진달래 축제 같은 곳에서 행사를 뛰는데 수익금은 선생님이나 그 위에 계시는 분들이 가져가셨죠. 그때는 2014년이고 저는 그저 큰 무대에 오르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했어요. 

대학의 동료들은 대부분 서울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어요.

충남 홍성에서 대학을 다녔는데 기숙사, 자취를 번갈아가며 그 근처에서 4년을 살았어요. 


홍성은 지역 문화를 잘 유지하고자 노력하는 지역이었어요. 그 지역에서 태어난 독립 운동가 분들을 상징으로 내세운 축제를 열거나 뮤지컬을 제작할 때 저희 학교와 자주 협업을 했죠. 하지만 수요는 많지 않았어요. 관객이나 공연장 등의 인프라도 부족했거든요.


그래서 대부분의 학생들이 서울로 가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 것일지도 몰라요. 물론 이게 100%의 경우는 아니에요. 제 동기 중, 현재 홍성의 유일한 극단을 만들어서 극장도 직접 운영하고 있는 친구가 있어요. 사실상 홍성의 유일한 극단이기 때문에 지역에서 잘 나가고요. 하지만 저는 대학 다닐 때 제가 계속 연극을 하려면 서울로 가야 한다는 생각이 있었어요.

길이 거기에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이건 너무 당연한 이야기예요. 


예를 들어 오늘 저녁에 고기 먹어야지, 생각했는데 집에 고기가 없으면 어쩔 수 없이 마트에 가잖아요? 이것과 같은 이치 같아요. 물론 부천에도 연극에 대한 인프라는 있어요. 국내 4대 영화제 중 하나도 부천에서 열리고, 만화 등 문화적인 부분을 많이 밀어줘요. 하지만 내가 배우로서 오디션을 본다고 가정한다면 서울에 오디션이 10개가 있고 부천에는 1개가 있는 셈이에요. 또 서울에서 활동하는 사람들이 소위 더 잘 나가는 듯 보인다면 서울로 가야 겠다는 생각에 의심을 품지 않게 되겠죠. 그래서인지 제 동기들이나 선후배들도 졸업하면 무조건 서울에 자취방을 구하는 게 당연한 루트가 됐었어요.

대학 때 만난 선배 덕분에 꼬리 물기로 작업을 많이 하게 됐어요.

운이 좋았던 게, 제가 나서서 뭔가를 하지 않았음에도 동문이라는 이유로 잘 챙겨 주신 것 같아요.


덕분에 좋은 분들을 많이 알게 됐고 선배와 작업하던 사람들과도 친해져서 새로운 작업으로 이어지기도 했고요. 이런 것들이 사실은 다 행운이죠. 저희 학교는 원래 연출 전공이 없어요. 연출이 있어도 60명 중 한두 명 나올까 말까 했거든요. 선배가 조연출을 구하고 있던 시기에 제가 추천을 받은 거죠. 연출자가 드물다 보니 연출을 전공하는 선후배는 그만큼 긴밀해지고요.

만약 후배가 제게, '이 지역에서 연극을 계속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하고 묻는다면 저는 이유를 되물을 것 같아요.

이 지역의 연극을 활성화시키고 싶다거나 하는 분명한 목표가 있다면 충분히 권할 것 같아요.


제 동기가 홍성에 극단을 만든 이유도 비슷한 결이에요. 그 친구는 홍성에 문화 공간을 만들겠다는 꿈이 있었어요. 한마디로 본인이 개척자가 되어 그 길을 다 뚫는 거예요. 그런데 어떤 일이든지 그런 개척을 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고 싶은데’ 이상의 어떤 결연한 의지가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데 대부분 그런 의지를 지니고 예술을 매개로 지역을 변화시키려 하기보다 나 자신의 활동으로써 나의 예술이, 혹은 내 직업으로써의 예술이 성공하길 바라고 변화를 이야기한다고 생각해요.

지금은 연극이 아니라 글 쓰는 작업을 하고 있으니 굳이 서울일 필요는 없어요.

혼자 하는 작업이니까요. 


하지만 결국 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 도래하면 서울로 가야해요. 제가 글쓰기만 한다면 협업을 안 해도 되겠지만, 심지어 이번에 책을 내기 위해 관련 회의를 하는데 서울에서 모였어요. 일러스트레이터, 북 디자이너 분은 파주에 살고 부천에 사는 저까지 셋이었는데 셋 다 어차피 직장이 서울이니 서울에서 보시죠, 이렇게 되는 거죠. 그러니까 이건 문화예술 씬에서만 발생하는 문제가 아닌 것 같아요. 전반적으로 서울에서 모일 수밖에 없는 이유들이 많은 거죠.


볼거리, 먹을거리, 교통, 인프라 등. 어쩌면 대한민국이 가지고 있는 총체적인 문제가 집약된 현상이라고 해야 할까요? 하다못해 약속을 잡아도 안양에 사는 친구, 부천에 사는 친구, 인천에서 사는 친구가 있다면 그 셋이 사는 곳 중 한 지역에서 모이기보다 합정에서 만나자, 강남에서 만나자, 대개 이렇게 되죠.

서울에서 살고 싶다는 마음은 당연히 있어요.

서울까지 오기가 너무 힘들거든요. 


직장이 충정로에 있는데 ‘도어 투 도어’로 집에서 회사까지 편도로만 1시간 30분이 걸려요. 일주일에 두 번 재택근무를 하는데 그 3시간의 출퇴근 시간이 있는 날과 없는 날은 하늘과 땅 차이예요. 교통이 좋은 곳은 자연스럽게 집 값이 올라가듯 요지에 살고 싶다는 마음은 대부분의 사람이 가지고 있는 니즈인 것 같아요. 


제가 만약 서울이 아닌 특정 지역에서 주도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A와 B의 선택지처럼 둘 중 하나를 고르는 문제라고 한다면 저는 서울행을 선택할 것 같아요.

지역의 문화재단과 중앙의 문화재단이 어떤 '콜라보'의 움직임이 있으면 좋지 않을까 생각해요.

제 작품의 발표는 서울에서만 해봤어요. 24살 때 대학로 ‘라온 시어터’에서 ‘한여름 밤의 꿈’을 연출했어요. 그 다음이 양천구에서 개최한 전시였고, 그 해에 ‘프린지’페스티벌에서도 전시를 했죠. 


내가 사는 지역에서 공연을 올릴 수 있을까? 상상해 보니 떠오르는 생각이에요. 말하자면 교환 학생처럼요. 예를 들어 서울문화재단과 부천문화재단이 협업하는 행사, 또는 지원사업을 함께 만들어서 작품발표도 서울의 어느 공간, 부천의 어느 공간을 지정하여 공연할 수 있도록 한다면 어떨까 싶어요. 아예 대놓고 서울과 지역이 협업하는 방향이 실질적으로 지역의 예술가들에게 도움이 되는 방안이 될 수 있지 않을까요.

양귀자 작가의 소설, '원미동 사람들'의 배경이 되는 그 원미구에서 살고 있어요.

10살 때부터 살았으니 거의 20년이 다 되어 가네요. 그 전에는 시흥시에서 살았고 서울 양천구에서도 잠시 지내다 부천으로 왔어요. 


부천은 공원 등지에 소극장이 꽤 있어요. 공원 내부에 아고라 형태의 광장, 야외 소극장 같은 곳들도 있고요. 고등학생 때, 그런 극장에서 공연한 적도 있죠. 부천시청 뒤편에 공원이 있는데 잔디밭이 넓게 펼쳐진 ‘고곡마을’이라고 있어요. 그곳에는 행사도 많이 열려요. 부천에서 유난히 좋아하는 장소에요. 

내가 사는 지역, 지역에서의 경험이 글감이 될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해요. 

예를 들어 제가 최근 쓴 책의 내용 중 폐지 줍는 할머니에 관한 이야기가 있어요.


어느 지역이나 그렇겠지만 부천에도 사회적 약자, 취약계층의 노인 분들이 많으신데 그 분들을 보면서 떠오른 단상을 쓴 글이에요. 사회적 약자를 도와주고자 하는 마음 자체도 실례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었어요. 그 사람의 인생을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그가 어떤 상황인지 겉으로만 봐서 추측하는 행태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들에게 동정의 마음을 보내는 것마저 어쩌면 실례일 수 있겠다고 생각 했는데 사실 그건 용기가 없는 나의 변명인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동시에 했어요. 


폐지를 줍다가 잠시 쉬고 계신 할머니께 바나나 우유를 사 드리고 황급히 도망친 적이 있는데 그분이 저한테 미안하다고 하셨단 말이에요. 제 등뒤에서 계속 ‘미안해요, 미안해요’ 하시는 거예요. 집에 가면서 그 미안해요가 계속 머릿속에 남았어요. 그분은 어떤 삶을 사셨을까, 또 그걸 내가 궁금해해도 되는 걸까, 대체 뭐가 미안한 걸까. 이런 식으로 꼬리를 물고 느껴지던 답답한 감정을 담아 썼던 에세이였죠.

내가 사는 동네의 특수한 점이라면 명과 암이 뚜렷하다는 거에요.

저는 어떤 사회가 가지고 있는 부조리함에 대해서 ‘어떤 부조리가 있기 때문에 혁명을 일으켜야 돼.’ 이런 식이 아니라 ‘부조리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거야.’ 하는 허무주의로 이어지는 경향을 작품에 많이 드러내게 돼요.


집에서 10분만 걸어가면 완전한 대도시에 대형 백화점이 2개나 있고 그 번화가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임대 아파트 촌이 나와요. 그 좁은 거리를 사이에 두고 양지와 음지가 함께 보인단 말이죠. 거기서 오는 영감도 커요. 부천을 모티브로 작품을 쓰게 된다면 이 같은 명암을 왔다 갔다 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써볼 거예요.

나의 하루는 이래요.

보통 해가 지고 난 뒤의 시간을 활용해서 글을 써요.


기름지지 않은 저녁으로 배를 채우고 좋아하는 음료를 냉장고에서 꺼낸 뒤 책상에 앉죠. 주제의 시작을 간단하게 꿰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계획을 하지 않는 편이에요. 글을 쓰면서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다양한 영감이 줄줄이 딸려 나올 때가 많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글쓰기를 서핑과 비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서핑을 한번도 해보지 않았지만요). 


첫 파도를 어떻게 타느냐에 따라 그 흐름을 꾸준히 이어 나갈 수 있다는 것은 글쓰기와 매우 흡사한 것 같아요. 운이 좋을 때면 글을 한 호흡에 다 쓸 때도 있지만, 보통은 흐름과 집중이 끊겨 중간에 핸드폰도 보고 인터넷도 봐요. 그러다 실증이 날 때 다시 키보드를 누르는 편이죠. 글을 다 쓰고 나면, 상황마다 다르지만 검수는 다음날 하려고 해요. 오늘 쓴 것이 여러모로 마음에 들지 않을 확률이 높지만 당일에 확인하면 과열된 머리인 탓에 미처 보이지 않는 부분이 생기기 마련이거든요. 글을 다 쓰고 나면 기분 좋게 노트북을 닫아요. 보통 새벽이 넘어가는 시간이라 바로 잠이 쏟아지죠. 목표한 글을 다 쓴 날엔 잠을 푹 자요. 그런 만족감때문에 글을 쓰는 것 같기도 해요.

마치 이상향 같은, 나의 예술로 꾸는 꿈이 있어요.

저는 종종 개인의 인생은 너무나도 허무하지만 사람들이 겪어내고 있는 상황이나 환경은 우리가 계속해서 관심을 갖고 지켜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해요. 현 시대를 반영한 ‘밑바닥에서’나 ‘손님들’같은 작품을 만들고 싶달까요. 혹은 현대판 ‘고도를 기다리며’ 같은 작품도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