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울 인터뷰

💬 2024 INTERVIEW  |  강건

"하지만 결국은 

내가 선택한 거라는 생각이에요."

어릴 때부터 밖에 나가 축구하고 그러는 것보다 

집에서 만화책 보는 걸 더 좋아했어요.


어머니께서도 그런 걸 알고 계셨죠. 얘는 그림 그리고, 퍼즐 맞추고, 집에서 혼자 하는 것들을 좋아하는구나. 

초등학교 때는 교내에서 하는 그림 대회 같은 걸로 상도 받아오고 하니까 미술에 소질이 있나 보다 하셨나봐요. 저도 물론 좋아했고요. 중학교 때 집이 성남 분당이었는데 근처에 계원예고가 있다, 입시미술을 한 번 해보자 해서 그렇게 시작된 거였어요. 계원예고에 못 붙으면 사실 다른 예고를 가도 되잖아요? 그런데 저는 같이 

준비했던 친구들이 있어가지고 그때는 딱 그 한 군데를 못 붙으면 다른 데는 안 간다고 했었어요.  

입시 때 입시 미술학원을 가잖아요? 

제가 꼴찌였어요.


미술학원 가자마자 봤던 평가도 그렇고 중간중간 테스트가 있는데 늘 하위권에서 놀았죠. 

알고 보니 제가 예고 입시를 되게 늦게 시작한 케이스였던 거예요. 다른 학생들은 다 중1 때, 아니면 이르게는 초등학교 6학년 때 시작하는 경우도 있는데 저는 중학교 2학년 말쯤 입시학원을 들어갔어요. 

학원에서 하루에 세네 번씩 시험을 봤어요. 그런 뒤에 애들은 나가 있으라고 하고 선생님이 평가하고 다시 

딱 가면 등수가 다 인쇄돼서 붙어 있어요. 기억이 정확하진 않아도 저는 40등 위로는 못 올라갔던 사람이었죠. 입시 1~2주일 전에는 막 새벽까지 그림만 그렸던 기억이 나요. 노력이 결실을 맺었는지 그래도 원하는 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어요. 

1학년 때 미술 안에서도 한국화, 조소, 서양화, 

디자인 등 세부 분야를 다 경험해보게 하고 그 다음 전공을 선택해요.


저는 조소를 선택했죠. 선생님이 꼬드긴 것도 이유 중 하나였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렇게 지겹게 종이에다가 그림 그리다가 흙을 만지면서 무언가를 만드는 그 시간이 너무 좋았던 것 같아요.

사실은 입시미술을 하고 예고에 들어갔던 게 

만화가가 되려는 생각에서였어요. 


지금으로 말하면 웹툰 작가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네요. 만화가가 되려면 아예 애니메이션 고등학교를 

입학하거나, 예술고등학교의 미술과라도 조소 말고 디자인을 전공으로 선택해야 했어요. 

그런데 1학년 때 디자인 수업을 들을 때 왠지 자꾸 마음이 안 갔어요. 수업에서 ‘구랑 선을 가지고 이동감을 

표현해라’는 주제를 던져 받고 그림을 그리면 그걸 사람들의 시각이 어떻게 돼서 표현이 이렇게 되어야 하고 

면서 이론적으로 풀이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내가 그림을 그리는데 다른 사람들의 시각으로 생각하면서 

그려야 된다는 것에 대한 반감이 있었어요. 그래서 제 맘대로 했죠. 나는 이렇게 하면 멋질 것 같다 싶어서 

그림을 그리면 선생님께서는 그렇게 하면 이게 이동감이 표현이 안 되지 않니 하면서 지적을 하시는데 

그때는 그게 납득이 안 되는 거예요. 무슨 반골 기질이 있었는지 이런 게 디자인이면 나는 안 하겠다 하고 

조소를 선택했죠. 


조소과를 선택하는 사람은 사실 많지는 않은 편이에요. 그래서 그랬는지 선생님들이 저한테 너는 손이 조소과다, 조소과 와야 된다 하시는 것도 있었지만 부추김 때문만은 아니었어요. 지하에서 작업하는 그 분위기가 

좋았고, 흙으로 얼굴을 만들고 사람을 만들어내는 과정의 재미가 있었어요.

저는 고등학교 때 추억이 제일 많은 사람이에요. 


고등학생 때 미전이라고 해서 미술 전시를 해요. 학교에서 하는데 따로 마련된 공간은 없어도 교내에서 우리가 처음으로 자기 미술 작품을 만들어서 복도 등에 전시하는 거예요. 고2 땐가 그랬는데 선생님들도 분위기가 

‘니네 놀아라’ 하는 느낌이었어요. 저는 잠은 집에 가서 자는 스타일이라서 가서 자고 아침에 다시 등교하면 

전날 밤샌 친구들이 자고 있는데, 저희 학교에 구름다리라고 어떤 건물과 건물이 이어져 있는 구간이 있는데 

거기에 빨래처럼 하나씩 널려져서 자고 있었어요. 


그렇게 지내다가 경원대학교로 진학해서 1학년을 다녔어요. 


학회 임원도 하고 그랬으니까 잘 적응해서 다녔다고 할 수 있죠. 2학년 1학기까지 등록했다가, 사실 그 등록금까지 낭비하고 군대를 갔어요.

군대에서 보내는 시간 동안 제가 그 전까지 

인생을 좀 잘못 살고 있지 않았나 고민했어요. 


왜 그렇게 살았나 싶어가지고 전역하고 나서는 바로 1년 동안 학교에는 돌아가지 않고 일을 했어요. 돈을 벌어보고 싶었던 거예요. 전역하고 바로 다음 날부터 마트에서 배추 옮기는 아르바이트를 시작했어요. 

그 일을 이틀인가 나갔는데 학교 동기 형한테 연락이 왔어요. 서로 안부 묻다가 자기가 지금 영화 특수분장하는 일 하고 있어서 나와 있는데 같이 해보자고 하는 거였죠. 좋은 경험이 될 것 같아서 마트 쪽 일은 바로 정리했어요. 특수분장 회사에서 3~4개월 정도를 일했어요. 3개월은 수습 기간이라고 월에 8~90만원 정도 주더라고요. 업무시간이 그런데 무조건 오전 9시 전에 나가서 끝나는 건 오후 6시로 되어 있기는 한데 정시에 끝난 적이 없었죠.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복학을 해서 한 학기를 다녔어요.


경력이라고 하긴 애매하지만 *토피어리(Topiary, 자연 그대로의 식물을 여러 가지 동물 모양으로 보기 좋게 

자르고 다듬는 기술) 일도 해보고 그 외에도 정육점에서 소 꼬리 자르는 일을 한다든지, 실내 인테리어라든지 정말 다양한 아르바이트를 해서 나름대로 많은 경험을 갖고 학교로 돌아갔어요. 그런 경험들이 머리에 있다 

보니 내가 이 학교를 졸업하면 그 이후에 하게 될 일들을 미리 겪었다는 생각을 감히 했던 것 같아요.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했죠.

우선 학교생활을 굉장히 열심히 하게 됐어요.


학고를 맞던 놈이 장학금을 받게 되고, 장학금을 받으니 자신감이 생겨서 더 열심히 하게 되더라고요. 

내가 공부 쪽으로도 하려면 할 수 있는 사람이구나 싶었던 차에 여자친구가 졸업을 하게 됐어요. 

졸업하고 유학을 가겠다더라고요. 여자친구는 계속 작가를 하고 싶어했거든요. 그래서 유학을 경험해보고 

싶다, 같이 갈 거면 가고 아니면 자기 혼자 가겠다 해가지고 저도 가겠다고 하게 된 거예요. 미래에 대한 걱정도 있었고 새로운 경험을 좀 더 쌓고 싶었거든요. 지금 내 눈에 보이는 길들은 군대를 전역하고 했던 그 경험들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 같았어요. 유학으로 지금을 벗어나 있으면 시야가 더 넓어지지 않을까 생각했죠. 


그런데 여기서 또 잘못된 반골 기질이 작용합니다. 영어를 다 하니까 영어권은 가기 싫더라고요. 그러면 선택지가 대충 프랑스, 독일이 남았는데 독일은 또 사람들이 유학을 많이 갔어요. 나는 사람들 많이 가면 안 가지, 하고 프랑스를 선택했어요. 제가 군대를 전역하고 여자친구랑 여행을 갔었는데 그게 프랑스였어요. 그때도 마음에 들었었는지 여자친구도 프랑스 유학을 결심했었고요. 그렇게 해서 스물 넷 때 프랑스로 유학을 떠났습니다. 

프랑스에 가서 먼저 프랑스어 공부를 

1년을 하고 미대에 입학했어요. 


한국에서 대학을 다닐 때는 작가를 하겠다는 친구는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어요. 저만 해도 그림 그리는 게 

좋았을 뿐이지 구체적인 꿈을 가지고 전공을 선택한 건 아니잖아요? 그런데 프랑스의 대학에 가보니 대부분의 학생이 작가를 하려고 입학한 거였어요. 분위기가 너무 다르죠. 그 안에서도 내향적이거나 소극적인 친구들은 있지만 그마저도 열정적인 친구들이라고 느꼈어요. 과제가 있다면 한국에서는 일단 빠르게 완성만 해야겠다 

하는 분위기가 어느 정도 있잖아요? 이 친구들은 학기 끝날 때까지 작업을 완성 못할지언정 본인의 작업에 

진심을 다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작업을 사람들에게 프레젠테이션할 때 굉장히 그 과정 내내 작업을 사랑했다는 게 느껴졌어요. 유학을 가서 기술적인 향상을 많이 이뤘다기보다 저는 이런 부분을 많이 배워 온 것 같아요. 

그런데 그건 그거고 저는 작가가 

되겠다는 생각은 여전히 없었어요.


경험을 해보자는 게 컸고 여전히 졸업이 목적이었어요. 프랑스는 학부가 3년인데 저는 2학년에 편입을 했었고, 다음해인 마지막 학년에 파리에서 개최되는 미술 콩쿠르에 나갔죠. 덜컥 입상을 했어요. 입상을 한 사람들 중에서 10명을 뽑는데 거기에도 뽑히고, 그 안에서 1, 2, 3등을 정하는데 3등을 하게 된 거예요. 그렇게 뽑힌 세 명에게는 도핀현대미술상 수상자전이라고 해서 파리에서 전시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줬어요. 

*파리 보자르(Beaux-Arts de Paris, 프랑스 파리에 위치한 순수미술 전문의 명문 소수정예 고등교육기관) 앞에 갤러리들이 있는데 그 중 어떤 국립기관이 운영하는 갤러리에서 전시가 진행됐죠. 그렇게까지 되니까 여기저기서 연락이 오는 거예요. 개인전을 하자, 아니면 어디서 단체전을 하는데 같이 하자 이런 연락들이 계속 오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까지도 저를 소개할 때 

작가를 했다고 하지 않고 작가가 됐다고 얘기해요. 


작가를 하면서 지금도 계속 새로운 작은 욕심들이 생기는 이유가 애초에 작가를 할 마음이 없어서였던 것 같아요. 예전에는 그냥 연결이 그렇게 되다 보니까 큰 고민 없이 하다가 점점 내가 좋아하는 작업을 해왔나 

질문하게 되고, 그런 걸 계속 찾아가면서 지금도 작업하고 있거든요.

대학생 때 작가로 이곳저곳에서 전시하고 있는 

대학원생 선배랑 얘기할 일이 있었어요.


그때 문득 물어봤어요. “형, 작가는 어때요?” 모르니까 물어본 거거든요. 술만 마셔봤지 작가에 대해서 그때 뭘 알았겠어요. 저는 그때 그 선배 정도면 나름대로 유명해진 작가라고 생각했었어요.


질문이 좀 불쾌했었는지, 그 선배의 답변은 “요즘은 개나 소나 작가를 한다.” 였어요.

제가 그때 작가 하겠다고 물어본 건 아니었는데, 그럼에도 그때 들었던 그 답변이 요즘까지도 생각이 납니다. 그 말에 발끈해서 작가가 된 건 아니에요. 다만 이후에 제가 어떤 작업을 할 때, 미술을 하면서, 더 진심을 담아내서 할 수 있게 된 원동력이 그때의 대화였다고 생각해요.

예전에는 잘 팔리는 작가가 

최고의 작가라고 생각했어요. 


또 어떤 때에는 실용적인 걸 해내는 작가가 최고라고 생각했죠. 지금은 둘 다 아니고 행복하게 작업하는 작가가 최고인 것 같아요. 사실 지금의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따라서 답이 달라지는 질문이에요. 

내가 돈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작품이 잘 팔리는 게 당연히 최고의 가치겠죠. 굳이 그렇지 않은 상황에서라면 

나의 솔직한 작업을 하는 것이 더 가치가 높겠고요. 다만 그런 솔직함으로 작업을 하면서도 내 스스로 행복함을 느껴야 저는 더 좋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지금 저는 무언가 신경을 많이 쓰면서 작업하고 있지 않아요. 어디 갤러리 소속도 아니고, 눈치 보면서 작품을 만들지 않죠. 그렇다고 지금까지 작업이 하나도 판매가 안 됐다, 전시가 없었다, 그렇지도 않아요. 


그래서 어쩌면 내가 갖지 못한 부분을 

채우지 않는 게 더 좋은 작가가 되는 길일지도 몰라요.


왜냐하면 제가 생각한 그 빈 부분은 안정감이거든요. 그런데 돌이켜봤을 때 제가 안정감을 느끼는 상태일 때 더 좋은 작업이 나오지는 않았던 것 같아요. 슬픈 일이지만 내가 더 불안정할 때 항상 더 나은 작업이 나왔던 것 같아요.

미래의 나 자신에게.


나는 요즘 들어서 조금은 건강을 생각하고 있어. 

조형 작업을 하면서 건강에 좋지 않은 재료들을 계속 사용하다 보니까 그래도 나름 60세가 된 너를 위해서 환기도 한 번 할 거 두 번, 세 번씩 하고 공기청정기도 잘 쓰고 있단다. 

그리고 나중에 이게 더 나은 결과로 이어질지 어떨지는 모르지만 그래도 내 작업 안에서 나한테 솔직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고 있다. 내가 좋다, 별로다 느끼는 것들을 구분하면서 더 나다운 게 뭔지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