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INTERVIEW | 이태헌
"어느 순간부터 예술을 하는 일보다 예술가로서 존재하는 일에
더 에너지를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아요."
흔히 *뉴미디어 아트(컴퓨터 애니메이션, 가상현실, 온라인 세계와 같은 새로운 기술을 포함하는 광범위한
현대 예술작품)는 한국에서는 AI, XR, 그리고 요즘 여기저기서 많이 보이는 ‘파티클’과 같은 기술들을
활용해서 창작돼요.
작년까지 저도 뉴미디어 아트 작업을 하다가
올해 ‘필름 기반의’ 작업 위주로 전환했어요.
저도 모르게 미디어 아티스트의 트렌드에 맞는 작업을 해야 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 같아서, 일부러 한 번 깨고 싶었죠. 저는 원래 영화를 하고 싶었고 실제로 영화 작업도 했었거든요. 그래서 올해 개인전은
스토리텔링 기반 신작위주로 많이 구성했습니다.
창작을 경험했던 첫 기억은 아마도
중학교 3학년 때였을 거예요.
아버지께서 디지털 카메라를 사 주셨어요. 저는 그걸로 찍은 사진들을 엮어서 드라마처럼, 웹툰처럼 이야기를 만들었어요. 그 당시에는 웹툰이라는 용어가 없었을지도 모르겠네요. 새벽까지 사진을 이어가며 만든 걸 친구들끼리 하던 메신저에 공유하고 재밌었다, 하면서 한숨 자고 일어나니까 그 지역 중학교에 다 퍼졌더라고요.
지금 대학 시절로 돌아간다면
단편부터 많이 써보려고 할 것 같아요.
학생이었던 때에 저는 너무 완벽한 시나리오, 적어도 훌륭한 장편 시나리오를 쓸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죠. 잘하고 싶어서 오히려 시나리오를 잘 쓸 수 없었고, 장편 데뷔도 그래서 힘들었어요. 스물다섯 때 처음 단편을 만들었는데 돌이켜보면 그때도 상당히 어린 나이에 소규모의 투자를 받아서 제작할 수 있었어요. 운이 좋았죠. 투자를 받았지만 작업하면서 제 페이도 책정하지 않았어요. 제가 연출이자 제작인데, 배우들과 다른 스탭들에게 정당한 대가를 주지 못한다는 죄책감 때문이었을까요?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그 사람들이 나를 ‘도와준다’고
생각하는 것이 지금 이 작업 전체를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는 것처럼 느껴져 거북하기도 했죠.
영화는 공동 예술이고, 그들도 그들의 목적을 가지고 나와 함께 일하는 건데 이 작품은 나의 것이라고 생각하는 마음이 생기는 것을 경계했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생각이 너무 많았죠.
두 번째 단편 작업까지 한 뒤로 스탭들과
함께 일해야 하는 작업이 두려워졌어요.
제가 실패하면 함께 일하는 사람들 돈도 못 주면서, 커리어에도 보탬이 안될 거란 것이 커다란 죄책감으로
다가왔죠. 시나리오라도 어떻게 써봐야 하지 않을까 하는 마음만 태우면서 간간히 영상 쪽 일을 하며 지냈죠.
원래 영국으로 유학을 가려고 했던 건 아니었어요.
영국에 가족이 있었거든요. 그때 같이 예술하는 친구들끼리 신병 걸렸다고 농담을 많이 했는데, 예술을 하는 걸 거부하면 그 병이 도지는 거라고 자주 그랬어요. 그 당시 제가 그랬죠. 개인적으로 힘든 일도 있었고 시나리오도 잘 안 써졌으니까요.
마침 영국 워킹홀리데이 비자가 되었고,
현지에서 촬영일도 하게 되었어요.
정신적으로 쉽지 않은 시기여서 상담치료를 알아보기도 했는데 굉장히 비싸더라고요. 그때쯤 VR(Virtual Reality) 기술이 다시 각광받고 있었는데 저는 이걸 활용해서 상담치료와 관련한 프로젝트를 구상했어요.
비싼 가격 때문에 본인이 힘든 상황인데도 상담치료를 받을 수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VR을 이용한 정신적인 치료 요법을 만들고 싶은데 다학제적 연구일 것 같으니까, 어디 학교에 들어가서
연구하는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좀 좋은 학교가 덜컥, 영국 왕립예술대학이 돼버려서 ‘얼레벌레’
들어갔어요.
당시 생각은 가상공간을 멋지게 꾸며 놓고 그 안에서 피경험자가 미술 치료를 비롯한 여러 예술 치료를 받을 수 있게 하는 구상이었어요. 거기서 나온 그림이라든지 데이터들이 자동으로 의사한테 전달이 되고 그에 대한
피드백을 이후에 받게 되는 그런 시스템이었죠. 그런데 전문가와의 인터뷰 후, 치료라는 게 안정적인 환경을
제공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할 수 있다는 피드백도 있었어요. 의학적인 전문성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접근을
하는 게 쉽지 않은 일이더라고요.
학업의 과정 내내 어떻게 하면 이 프로젝트를
성공시키지 하는 생각만 했죠.
그런데 논문을 쓰고 보니까 코스트가 안 맞아요. 저소득층이 적정한 의사에게 직접 가서 치료 받는 경우를
가정한 가격보다 제가 생각한 가상 환경 속 치료 요법에 지불해야 하는 가격이 더 높은 거예요.
목적에서 실패해버렸으니까 연구결과로 인정되지 않았고, 따로 졸업작품을 해야 했어요.
그때 학교에 있던 강이연 교수님께서 이 *프로젝션 매핑(Projection Mapping, 대상물의 표면에 빛으로 이루어진 영상을 투사하여 변화를 줌으로써, 현실에 존재하는 대상이 다른 성격을 가진 것처럼 보이도록 하는 기술)을 이용해 작품활동도 하고 강의도 하고 계시더라고요. 교수님의 작업을 관심있게 지켜보다가 기존에 제가 생각했던 정신 치료와 결합한 졸업작품을 냈어요. 내가 가지고 있는 자기 인식이나 세계관을 다르게 감각하는 것이
정신 치료의 새로운 출발일 수 있겠다는 가정을 바탕으로 한 작품이었죠.
유더원*(<You, the one>, 2020)이라는 작품이었어요.
생각의 틀 같은 프레임들이 관객들을 지나가고, 그러다 보면 거울 형상의 마네킹이 지나가는데 관객이 무언가를 만지거나 상호작용을 할 때 그 거울 형상에서 이미지들이 쏟아지는 거예요. 크게 6개의 이미지가 있었는데 호랑이, 나비, 어쩌면 프레임 그 자체이기도 하고 이미지들끼리 서로 중첩되기도 하는 다양한 모습이었어요.
그걸 관객들에게 보여줌으로써 내가 비치는 현상이 다르게 느껴질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관객 경험을 통해
풀려고 했던 시도였죠.
운이 좋아서 그 졸업작품이 한국에서 수상을 하게 됐고
그 일로 전시를 하게 됐어요.
그래서 한국에 들어가려고 했는데 런던에서 공항으로 가는 우버 택시안에서 코로나 때문에 전시가 취소됐다는 연락을 받은 거예요. 한국에서 지낼 집도 이미 계약을 끝낸 상태였어요.
이 때 저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있었는데 하나는 게임회사에 들어가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광주에 있는 *레지던시(Residency Program, 프로그램에 선정된 예술가가 일정 기간 동안 특정 공간에 거주하면서 재정적인 지원을 받으며 다른 예술계 인사와 교류하고 창작활동을 함)에 가는 거였어요. 회사는 나중에도 취업할 수 있겠지 싶었고, 레지던시는 아티스트 타이틀이 있을 때에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광주로 갔는데 또 예술가로서 일할 수 있는 계약들이 계속 이어졌어요.
우선 21년 개인전 계약이 됐고 다음 해에는 독일에 가서 하는 교류프로그램이 있고, 이런 식으로 계속
포기하기 힘든 기회가 띄엄띄엄 있는 거예요. 작년에도 여기까지 하고 그만할까 싶은 마음이 들고 있을 때 즈음 다음해인 올해 여름, 홍콩에서 하는 어떤 공연에 참여해달라는 연락을 받아서 또 활동이 이어졌고요.
21년도에 개인전을 하면서 했던 표현 중에
영화는 소설을 쓰는 것 같고 미디어 아트는 시를 쓰는 것 같다는 얘길 했었어요.
특히 회화적인 작업을 많이 하고 있던 때였어요. 하지만 이런 생각도 늘 갖고 있었고 저 자체도 시각예술
필드에서 활동하는데 항상 작업 노트는 ‘무언가 이야기하고 싶어 한다, 이야기하려 한다.’ 이런 식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도 왜 아직도 영화를 하지 않고 시각예술을 하고 있냐고 한다면 솔직한 마음으로는 혼자서 커버가 가능한 일이라서 인 것 같아요.
영화보다 내가 져야 하는 책임도 적으면서 또 저만의 세계관을 만들 수 있는 일이거든요. 정작 그러면서도
어떤 작품은 작업과정에서 굉장히 많은 사람들을 이끌고 해야 했다는 게 아이러니죠. 어쨌든 그러고는 있지만 결국 영화를 했던 학생 때도 지금도 그저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내가 풀 수 있는 방식 안에서 하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예술가들이 다 비슷하겠지만 “나 여기 있어요.” 하는
얘기를 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일기장 작업이란 말 있죠? 일기장 작업을 하는 저를 종종 발견하는데, 그런 방식으로 하면 안 된다는 얘기도
하잖아요. 하지만 경계를 계속 하면서 해도 일기장 작업이 되는 걸 어쩔 수가 없어요. 어쩌면 제 정신적인
부자유 또는 결핍의 투영이겠죠.
*리플렉팅 앤 리플렉티드(<Reflecting & Reflected>, 2022)라는 개인전을 202년도에 했는데 서로 반영하고
반영 받는다는 개념이 주요 테마였어요. 그 이야기의 주인공은 두 블랙홀이었어요. 빨간 블랙홀과 파란
블랙홀인데 짐작하실 지 모르겠지만 살짝 정치적인 상징성도 들어갔어요. 어떤 두 혐오 집단이 서로의 블랙홀로 빨려 들어간다는 거였는데, 꼭 색깔로써 정치적인 의미를 드러내고 싶었다기보다는 서로 혐오하는 두 집단의 상징성만 가져다 쓰고 싶었어요.
거대한 혐오를 다루려다 보니까 제가 그걸
자기 혐오로부터 꺼내오기 시작해야 했어요.
내 안에 있는 혐오에 대한 이해로부터 출발을 한 거죠. 그 작은 혐오 안에도 수많은 양가 감정이 있을 거 아니에요? 그런 감정들을 바라보면서 계속 파고들었던 거죠. 이를테면 ‘변증법’스러운 표현으로 해서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한 큐에 해결할 수 없으니까 조금씩. 정이 있고, 반이 있고, 그 다음 합으로 해서 조금씩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것부터 한 스텝씩 바꿔 나가자.
이 작품에도 “너는 블랙홀이지만 그래도 조금 다른 블랙홀이 될 거야.” 라는 저만의 스토리 라인이 있고, 그
이야기를 전달하기 위해서 어쩌면 영화적인 영상의 문법을 충실하게 따라요. 풀샷으로 투샷을 보여주고,
클로즈 샷을 보여주고, *OS(Over-the-Shoulder Shot; 인물의 머리나 어깨를 걸치고 그 너머로 다른 피사체를 촬영하는 것)로 보여주고, 그런데 사람이 아니라 블랙홀끼리 OS인 거죠.
옛날부터 사람들한테 감동을 주는
미디어를 만들고 싶다는 얘기를 해왔어요.
심지어는 대학교 학부 때 자기소개서에도 그렇게 썼을 거예요. 그 생각은 아직도 변하지 않았어요.
정말로 어떤 뭉클한 순간이라든지 의외로 공포의 순간일 수도 있고, 그 감정이 동하는 순간 사람들의 눈빛을
보는 쾌감이 있어요. 어쩌면 악취미죠. 예술가이기 이전에 인간인 저는 쉽지 않은 시간들을 수없이 삶 속에서 보내고 있어요. 제 작업 안에서 드러나는 전개의 과정도 우선 무언가에 만신창이가 된 캐릭터를 결말에서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뉘앙스를 가진 경우도 많거든요. 그런 힘겨움에 대한 사람으로서의 연대를 희망하는
부분도 가지고 있습니다.
어느 순간부터 예술을 하는 일보다
예술가로서 존재하는 일에 더 에너지를 많이 쓰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예술을 하고 싶은지보다 어떻게 살아남을지가 더 커져버린 거죠. 마치 공모사업의 지원서를 쓸 때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다, 좋은 뜻을 펼치겠다 쓰지만 결국은 지원금을 따내서 올 한 해를 더
지내보겠다는 게 더 중요한 것처럼요. 그런 마음이 제 안에서 커지니까 스스로 살아남기에만 급급해 어떤
프로젝트들은 구태의연한 마음가짐으로 진행하고 있지는 않은지 자꾸 돌아보게 돼요.
그래서 이번 전시를 신작 위주로 구성하면서
기존에 가지고 있었던 작품의 틀도 많이 깨려고 시도했던 거였어요.
동시에 이번 전시를 통해 아직 저의 스타일이라는 게 정립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는 걸 깨닫게 됐어요.
작품에 대해서는 항상 고민이 많아요. 확신이 없어도 확신 있는 척할 때가 많았죠. 이번 전시에서 옮겼던
무게추를 내년의 전시에서는 그대로 두어야 할까, 아니면 다시 크게 옮겨봐야 할까? 작가들이 그들 자신만의
세계관을 구축해가는 과정을 여러 가지 시도를 하면서 겪는다고 생각해요.
저도 지금 그런 수준의 작업을 하고 있지 않나 싶고요.
작업을 이어나가는 힘이요?
저는 작가니까 그냥 제 일을 하는 거예요.
이를테면 그만두고 싶다, 그만둬야겠다는 생각을 하다가도 또 요즘 정기 공모 시즌이거든요. ‘서울문화재단’, ‘한국문화예술위원회’ 등에서 공모사업 공고들이 올라오고 있어요. 저는 지금은 그래도 작가니까 일단 하는 거예요. 최소한의 직업의식이라고 생각해요. 정말 내가 아예 작가를 은퇴하겠다는 생각이 아닌 이상은... 회사원들 일하기 싫다고 일 안 가면 안 되잖아요? 저도 할 걸 해야 한다는 거죠.
서울이나 대도시에서 오래 지내며 작업했지만
저는 지방 생활이 더 마음에 들어요.
대도시는 작업실도 너무 비싸고 집을 사기도 힘들어요. 서울도 그렇죠. 젊은이들에게 집을 못 산다는 감각이
자리잡고 있는 것 같아요. 런던에서 한국으로 돌아올 때 광주로 갔는데 광주는 자동차 공장도 있고 대기업도
들어와 있고 하다 보니까 젊은 사람들의 삶과 분위기가 미묘하게 달라요. 불확실한 미래를 향해 삭막한 사투를 펼치는 서울과 달리 ‘스텝 바이 스텝’으로 미래를 만들어가는 느낌이에요.
작가들의 얘기로 한정해도 서울에서는 상상도 못하는 가격으로 큰 작업실에 들어갈 수 있으니까 일단 작업의 사이즈가 달라져요. 광주에서 다시 서울로 올라올 때 제가 할 수 있는 작업의 폭이 크게 줄어드는 걸 느꼈어요. 그래서 2022년도에 서울에서 개인전을 할 때도 결국 광주에서 다 작업해서 올라왔었죠.
그리고 작년에는 강릉에서 지냈는데 강릉도 작업하면서 지내기가 정말 기가 막히단 말이죠.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서울문화재단에서 지원사업을 따내는 것보다 강원문화재단에서 사업을 따는 쪽이 상대적으로 더 쉽고
가능성이 높아요. 지원자의 수 자체만 놓고 봐도 확률이 다르니까요. 물론 좋은 작업을 성실하게 한다는
전제 하에 말하는 거예요.
이런 생각들을 하면 왜 굳이 서울로 올라가나 싶죠. 누군가는 저에게 그건 네가 서울이랑 지방에서 이것저것 다 해봤기 때문이고 좋고 안 좋고를 자신에게 맞게 구분할 수 있게 된 것 뿐이라고 얘기해요. 맞는 말이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서울권에만 있었던 사람들은 서울 밖의 삶을 상상하기 힘들어하는 것 같아요. 항상 서울이 베스트는 아닌데 그렇게 여기는 것 같아 조금 아쉬워요.
미래의 나 자신에게.
끝까지 죽기 직전까지 버텨라. 죽을 때도 버텨라. 어쨌든 나는 ‘쳐맞아도’ 다시 일어나면서 버티고 있어. 그래서 지금의 네가 되지 않았을까? 그런데 그때도 좀 더 버텨야 될 것 같아. 버틴다는 건 결국 희망을 놓지 않는다는 거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