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울 인터뷰

💬 2024 INTERVIEW  |  소영

"지금은 성공이란 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추구하는 걸 완성하면 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저를 비롯해 국악을 전공으로 선택하는 많은 사람들이 
초등학교 때 특별활동으로 국악을 접해요. 


광주광역시에서 태어나 초등학교를 다니다가 *가야금병창(민요나 단가, 판소리 일부 대목을 가창자 자신이 

직접 연주하며 부르는 남도음악의 연주형태)으로 처음 배우기 시작했는데 그땐 제 진로로 선택할 생각까지는 없었어요. 재미삼아 하다가 6학년 때 가족과 함께 서울로 올라왔죠. 중학생이 되면서 특별활동을 선택해야 

하길래 가야금 부가 또 있네, 하면서 했다가 그때부터 빠져들기 시작한 거예요.

나이가 어릴수록 이런저런 거 따지지 않잖아요?


그때는 중학생인데도 국악이 너무 좋아서 국악이 나오는 방송 맨날 틀어 놓고 라디오로 국악을 들으면서

잠들었어요. 꿈 속에서도 계속 듣고 싶을 정도였거든요. 따로 공연도 혼자 찾아다니면서 볼 정도로 좋아했어요.

고등학교를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진학했어요.


그때 절 가르쳐주시던 선생님의 추천이었죠. 저는 국악 교육기관은 어떤 곳들이 있는지 잘 몰랐으니까요. 

시험을 봐서 들어가서 열심히 또 공부하고 연주하다가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진학했죠.

그렇게 대학까지 졸업했는데 알게 된 사실은 

출신 학교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거였어요. 


예술대학을 들어가기 위해서 학생들은 입시용 예술을 학습하잖아요? 음악도, 미술도 그렇죠. 어떤 정해진 틀 안에서의 연주나 표현을 연습해서 학교에 들어가면 갑자기 그런 방식에서는 배우지 못하는 걸 하라고 시켜요. 이를테면 창작곡을 만들라는 것 같은 과제를 주는 거예요.


어떻게 잘 해내서 졸업을 해도 연주자로서 계속 활동하려면 내가 스스로 악단을 꾸려서 창작 음악을 한다든지, 또는 기존 악단에 들어가야 하는데 국악은 자리가 안 나요. 쉽게 말하면 어떤 분이 은퇴를 하셔야 자리가 하나 나는 구조예요. 그런데 그 자리 하나가 얼마나 치열하겠어요? 다들 박 터지게 하는데 저는 그런 세계에 대해서는 몰랐어요. 졸업을 하려고 보니 대학원에 또 가기는 싫었고, 그렇다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졸업하고 나서 한 4년 정도, 

쌩뚱맞게도 관광 안내 일을 했어요.


서울시 관광협회에서 운영하는 ‘움직이는 관광안내소’에서 일했죠. 빨간 유니폼도 입고요. 또 다른 세계를 만난 것 같았어요. 학생 때부터 가야금, 국악하는 사람들이랑만 함께 지내다가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 거예요. 

영어 전공이다, 일본어 전공이다, 혹은 관광 전공이다. 처음에 그렇게 재미를 느끼고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수 있는 일인 것 같아 1~2년을 즐겁게 일했어요. 그런데 3~4년 째에는 직급이 올라가서 팀장이 되니까 관리 

업무를 해야 됐어요. 사람 관리를 한다는 것도 쉽지 않았는데 사무적인 일도 많아졌죠. 

기존 업무도 하면서 신입이 오면 교육을 시키는데 하루 종일 계속 말을 하면서 따로 신경쓸 것도 많아 꽤 힘들었어요. 


이상하게 힘이 들면 음악을 찾게 되더라고요. 다시 음악을 해야 될 것 같다 확신하기 전에는 음악회를 다녔어요. 클래식 음악도 좋아해서 가리지 않고 공연을 보러 다니는데 어느 날 막 눈물이 나는 거예요.

나는 음악이 없으면 안 되겠다. 


음악이 너무나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퇴사를 하고 숙명여대 석사과정에 들어갔어요. 그때 다시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만난 선생님께서 숙대로 출강을 하셔서 그쪽에 가면 계속 더 배움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특수대학원이었기 때문에 2년 반을 제가 학과 조교로 일하면서 동시에 전통음악 전공을 하는, 

근로장학생 같은 조건으로 학비를 면제받고 학교를 계속 다닐 수 있었거든요.


그렇게 대학원을 들어가 2020년 8월에 졸업했어요.


국악 전공은 가르침을 전수해주신 선생님을 따라서 연주를 가는 일이 많아요. 근근히 하는데 프리랜서 연주자로서는 전업이 될 만큼 엄청 돈이 되지는 않았죠. 옷이며 의상, 악기 관리까지 해서 사실 연주를 준비하는 비용이 더 많이 드는 경우도 있었어요. 이렇게 해서 어떻게 생계 유지를 할까? 고민하면서 1년을 버텨봤는데 더이상 안되겠더라고요.

잠깐이라도 직장을 구해 일을 해야겠다 

싶어서 그때는 콜센터를 다녔죠.


출입국·외국인사무소 비자 업무 관련해서 안내해주는 일이었는데 원래는 6개월 정도만 다니면서 돈을 모을 

생각이었죠. 콜센터 일을 하다 보면 굉장히 지쳐요. 말을 엄청나게 많이 하거든요. 화장실 갈 새도 없이 하루의 할당량을 채워야 하죠. 저는 말도 느린 편이고 최대한 전화를 거신 분들의 궁금한 점을 설명해드리려 하다 

보니 통화 하나하나가 길어졌어요. 하지만 대부분의 콜센터가 중요시하는 건 할당량이고 하루에 받는 콜 수를 중요하게 생각해요. 콜 수가 떨어지면 실적이 낮다고 매일같이 관리자에게 불려 갔죠. 

어서 6개월을 채우고 그만두려고 했는데 코로나 사태가 터졌어요. 공연도 다 취소돼고 가야금으로는 먹고 살 수 있는 일이 더 없어져서 이게 내 운명인가 보다, 하며 계속 일했어요. 원래의 계획이었던 6개월의 기간이 2년 

7개월까지 늘어났죠. 점점 내가 살아가는 의미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때 취미로라도 가야금을 해야겠다 싶어 연습실을 빌렸어요. 혼자 퇴근하고 나서 2시간, 3시간씩 연습실에 

가서 연주하면서 그 시기를 보냈어요.

사람에게는 여러 가지 성향이 있잖아요. 


학생일 때의 저는 외향적인 성향은 못 되었고 조금 과장해서 얘기하면 혼자 예술병 걸려서 고독을 추구하는 

스타일이었어요. 10대, 20대 때 계속 혼자 하는 활동을 많이 했고 연습도 혼자 하니까 거의 자기 수양적 삶을 

살았던 것 같아요. 나 혼자 이러고 있고 들려줄 사람은 없으니까 이건 뭘 하는걸까 하는 생각도 자꾸 들었고요


그렇게 시간이 흘러서 지금에 이르게 됐는데 많은 예술가들이 예술로만 먹고 살기가 힘들어 투잡, 쓰리잡을 

하며 살고 있다는 걸 알게 됐죠. 콜센터 이후에도 계속 구직을 하다가 그래도 이번에는 음악과 관련된 일을 

하고 싶어서 찾아봤더니 서울 소재 모 대학에서 일할 사람을 뽑더라고요. 정규직이 아니라 계약직이었고 

월급도 많지 않았어요. 업무는 주로 교내 공연의 홍보와 운영에 관련된 일들이고요. 

근무조건이 좋다고 할 수는 없지만 음악과 더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에 지원해서 근무하고 있습니다.

일을 시작하기 전에 국악 관현악단 오디션을 봤었어요.


그거 하나 바라보고 정말 열심히 준비했었거든요. 순수음악 쪽이 다른 예술 분야랑 조금 다르다고 할 수 있는 부분이 ‘악기빨’이라고, 가지고 있는 악기의 품질이 결과에 영향을 미쳐요. 저는 자금이 부족하기도 하고, 

줄도 자주 못 갈고 그랬어요. 그런 데서부터 사실 소리의 질이 달라지긴 하거든요. 사실 저희 집이 대단히 

풍족한 가정은 아니었어요. 거의 엄마 혼자 저랑 제 동생을 키우셨거든요. 악기 같은 것도 남들이 다 새로 

산다고 저도 새로 살 수 없는 입장이었어요. 입시 때까지만 딱 도움을 받았죠. 

가야금에는 또 종류가 있어요.


산조 가야금, 정악 가야금, 18현 가야금, 현이 스물다섯 개인 가야금도 있어서 25현 가야금까지 기본으로 

네 종류의 가야금을 사용하죠. 그래서 계속 악기를 사는 가격이며 유지비가 만만치 않아요. 오디션 공고가 

자주 나는 것이 아니기에 일단 시험은 봐야지, 하면서 오디션을 봤는데 경쟁률이 워낙 치열하고 악기 상태도 

좋지않아 내심 주눅 든 마음도 있었고, 결과는 결국 안 됐죠. 그러면서 가야금을 내려놓고 시작한 일은 

생각보다 힘들었어요. 마음이 참 어렵더라고요. 한 3개월 정도는 연주도 하지 못했어요.  

국악 전공 동기들 중에는 지금 교수가 된 

친구도 있고, 국악단의 단원으로 들어간 친구도 꽤 있어요. 


또 국악과 현대의 음악을 접목해서 *범 내려온다(2019년 결성된 대한민국의 국악 그룹 ‘이날치’의 히트곡) 

같은 창작곡을 내며 프로젝트 팀으로 활동하는 경우도 있어요. 주변에 그래도 음악 안에서 잘 풀린 친구들은 

대개 네트워킹을 잘 했던 것 같아요. 정도를 벗어나지 않고 선생님과 대화도 많이 나누고, 자기 멘토를 찾아서 계속 레슨도 받고, 악기도 좋은 악기를 잘 관리하면서 쓰고요. 그런 삼박자가 다 만든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이상하게 예전에 제 선생님들께 가까이 지내면서 선물도 좀 드리고 이런 걸 잘 못하겠더라고요. 왜 그렇게까지 해야 되나, 내가 하는 일을 열심히 하면 알아주시지 않으려나 했어요. 사실은 어느 정도 다가갈 필요도 있었던 건데 말이에요. 학교에서 예술적인 테크닉, 마음가짐 같은 건 배울 수 있지만 이런 부분이라든지 졸업하고 무엇을 할 것이냐 하는 건 배울 수 없었던 거죠.

사실 학교에 다닐 땐 국악단원이나 교수처럼 

그때의 제 시야 안에 있는 모습들만 보이니까 

그렇게 되어야 성공한 거고 아니면 실패한 것 같았어요. 


하지만 지금은 성공이란 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자기가 추구하는 걸 완성하면 되는 것이라고 

믿고 있어요. 팬데믹 때도 그랬고 관광안내 일을 할 때도 그랬지만 음악이 없어도 살 수는 있었어요. 예전에는 정말 없으면 죽을 줄 알았던 때도 있었거든요. 석사 때까지도 ‘나는 가야금과 결혼했어.’ 라고 스스로 다짐하면서 남들이 가정을 이룬다든지 육아를 할 시간에도 나는 가야금을 해야 하겠다고 학교에서 늘 자정까지 

연습하고 그랬어요. 

대학생 때 한 번은 휴학을 하고 어학연수를 다녀와봤어요. 


그때는 장학금을 많이 받아서 영국에서 영어를 배울 수 있었어요. 장학금은 매번 받았던 건 아닌데 전액을 받아보기도 했고 50%, 70%씩 받았던 적도 있어요. 한 번쯤 어딘가로 떠나고 싶었던 것 같아요. *에딘버러 페스티벌(Edinburgh Festival, 스코틀랜드 에든버러에서 매년 8월에 개최되는 문화예술 축제)도 봤는데 신세계였어요. 모든 게 새롭고 말도 잘 안 통하고, 영국에 가서는 아기처럼 살았던 것 같아요. 


다행히 정말 좋은 호스트 패밀리를 만나게 돼서 그 한 곳에서 9개월을 지냈어요. 원래는 에딘버러에서 6개월, 런던으로 가서 3개월을 있다 오려던 계획이었어요. 그래서 런던을 갔는데 저랑은 안 맞았어요. 자연이랑 

어우러지는 맛도 있고 사람들도 조금 시골스러운 스코틀랜드에 더 애정이 갔어요. 그래서 런던에 오래 머물지 않고 다시 에딘버러로 돌아가서 지냈어요.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가치관도 접했고, 스스로 생각할 시간도 많아서 좋았어요. 

저의 10년, 20년 후의 미래는 어떨까요? 


잘 모르겠어요. 어떨 때는 절망편이고 어떨 때는 희망편이에요. 절망편은 꼭 절망이라기보다 지금과 비슷하게 희망적이지는 않은 느낌이에요. 20대 때 고민했던 것들을 지금도 고민하듯이, 40대 때에도 똑같이 고민하며 

근근히 살아가는 모습이죠. 연주도 연습실을 구해서 혼자 연습하고 생계는 생계대로 다른 일을 해서 해결하고요. 어떤 선택의 기로가 왔을 때 무언가를 하지 않으면 그렇게 될 것 같아요. 희망편을 말씀드리자면 요즘의 제가 변화하려는 노력을 많이 하고 있다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것 같아요. 


지금 이 인터뷰도 응하기 전 고민이 많았어요. 아까도 말씀드렸듯이 학생 때 다소 수동적인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이런 부분을 바꾸려고 ‘그냥 부딪혀 보자.’, ‘고민할 시간에 그냥 하자.’ 하면서 인터뷰에도 응하게 됐어요. 



무대에서 작든 크든, 연주를 하고 싶어요.


연주라는 건 누군가 들어줘야 더 큰 가치가 생긴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공유를 하고 싶어요. 대학생 때는 

창작이 힘들었던 부분이 있었지만 스스로 창작에 대한 아이디어가 좋은 편이라고는 생각해요. 

그래서 제가 만든 곡들이 누군가 단 한 명에게라도 기억되면 좋겠어요. 음반이어도 좋고 요즘 유튜브 같은 

소셜 플랫폼도 많이 활용되잖아요? 남기고 싶어요. 

소영이라는 사람이 이런 걸 했었네, 누군가 우연히라도 한 번 들어줬으면 좋겠어요.

언젠가는 지금의 시스템이 크게 바뀌었으면 좋겠어요. 


클래식 같은 경우는 국내에서 길이 없을 때 해외로 나가는 방법도 있잖아요? 콩쿠르라든지 해외 오케스트라도 있고 국외에도 배움을 얻을 수 있는 길들이 있을 거예요. 국악은 국내에서 인정을 받지 못하면 살아남을 수 

있는 길이 거의 없어요. 길을 조금 틀면 국악을 어딘가에 접목한 자기 예술로 공연도 하고 활동하는 분들이 

있지만 내가 만약 연주자가 되겠다고 하면 기본적인 구조는 어느 선생님 밑에서 ‘사사’를 하는 거예요. 

한 스승 밑에 제자들이 있고 또 그 밑에 제자들이 있는 그 관계가 폐쇄적이라 권력이 작용하는 경우도 있고 또 무대와 연결될 다양한 기회도 그 관계 속에서 나오는 부분이 커요. 국악 공연을 찾아보며 라인업을 보면 늘 

비슷비슷해요. 시간이 지날 수록 더욱 다양한 예술가들이 자기 세계를 맘껏 보여줄 수 있는 열린 구조의 많은 기회가 생겨나면 좋을 것 같아요. 

미래의 나 자신에게.


너무 애쓰지 마. 

그냥 애만 쓴다고 결과가 따라오는 건 아닌 것 같아. 자본주의 사회니까 돈을 목적으로 산다면 배고플 일은 없었겠지. 하지만 음악을 지속하는 이유가 돈 때문은 아니잖아. 하지만(삭제) 내가 원하는 어떤 이상과 같은 것들이 내 실력이나 노력으로만 100% 결과로 연결되는 건 아니야. 만나는 사람도 중요하고, 타이밍도 중요한 것 같아. 그러니까 너무 애만 쓰기보다는 마음 편히 네가 어떤 상황에 있는지, 본인이 어떤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지 볼 수 있었으면 좋겠어.


남들이랑 비교하지 말고, 눈치보지 말고, 좌절하지 마. 지금 살아있는 것 자체가 너무 잘 살아온 거니까. 지금 충분히 잘 하고 있으니 너 자신도 돌보고 그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