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INTERVIEW | 김혜원
"아직 저는 고민하는 중이고, 답을 찾지 못했고, 작업을 하면서 삶도 함께
영위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해요. 그래서 지금의 저는 80%입니다."
김혜원 | 영상 설치미술 작가
28살, 사진이랑 영상을 기반으로 한
설치미술을 하고 있는 김혜원입니다.
김나우(Nau Kim)라는 작가명으로 활동하고 있어요.
작가 생활을 시작할 때 혜원이라는 이름이 너무 흔하진 않을까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친구한테 얘기했더니
그런 이름 정할 때는 아무 뜻도 없어야 더 좋다고 하더라고요. 주변 친구들이 대부분 저를 그냥 ‘원’이라고
부르는데 그걸 어떻게 변형해서 ‘나우’라고 만들었어요.
초등학교 5학년까지 완도에 살았어요.
그때 어머니가 꽃집을 하셨는데 근처에 사진관이 하나 있었어요. 자주 놀러 가고 하다 보니까 사진관 주인
아저씨랑도 엄청 친했어요. 당시에는 필름 카메라를 많이 사용해서 사진을 찍고 현상도 하고 그랬잖아요?
사진관에 갈 일도 많겠다, 엄마한테 일회용 필름 카메라를 사달라고 해서 사진 찍으러 다니고, 다 찍으면 혼자 사진관 가서 사진 찍어왔어요 하고 드렸어요. 대단히 큰 계기는 아니죠? 그냥 주변에 보이는 것들을 찍기
시작했던 것 같아요.
세뱃돈을 모아서 초등학교 5~6학년 즈음 캐논 *미러리스(디지털 일안 반사식 카메라인 DSLR에서 미러와 펜타프리즘을 생략한 형태의 렌즈 교환식 카메라)를 샀어요. 얼마나 모았는지 꽤나 모았어요 그때. 스무 살이
돼서는 다시 필름 카메라를 샀고요. 광주에 있을 때 지하상가에 중고 카메라들을 취급하시는 할아버지가 한 분 계셨는데 그때는 또 거기 맨날 가서 “오늘은 뭐 들어왔어요?” 하면서 수다 떨고, 그러면서 카메라도 사 모았던 거예요. 그래서 디지털 카메라, 필름 카메라, 캠코더도 사서 왔다 갔다 하면서 찍었어요. 저는 어디 여행 가면
카메라를 항상 네 대씩 들고 다니면서 촬영을 해서 항상 무겁게 다녔었어요.
사진이나 영상은 찍는 사람의 눈으로 담는 거잖아요.
돌아다니면서 보이는 것들 중에 나한테 예쁘게 보이는 것들을 편집해서 모아 담는 느낌이에요. 그래서 여행
다닐 때 대부분 혼자 다녀요. 제 느린 사진 찍는 속도를 다 기다려 줄 사람이 없거든요. 어딜 걸어가다 보면
이것도 찍어야 되고 저것도 찍어야 되고 해서 오래 걸리죠. 비슷한 맥락으로 전시도 혼자 보는 편을 선호해요.
제 첫 작업은 음악을 하던 친구의 앨범 아트워크였어요.
어릴 때였는데 음악하는 친구 하나가 있었는데 앨범 커버 작업을 도와주면 좋겠다 해서 그때 처음 ‘시각’을
만들게 됐어요. 음악을 듣는 것도 좋아해서 청각을 시각으로 전환하는 그 작업에도 흥미를 느꼈어요.
아트워크 제작을 한동안 하게 됐죠. 하지만 이내 정적인 화면에서 느낄 수 있는 감정이 너무 한정된다는 생각이 들었고 약간의 회의를 느꼈어요. 이 제한을 돌파하기 위해서는 실체로 드러나는 것과 정적이지 않은 것을
해야겠다 싶어 제 작업을 시작하게 됐어요.
남들처럼 대학교를 20살에 진학하지 못했어요.
남들처럼 대학교를 20살에 진학하지 못했어요. 미대 실기과를 준비 했었는데, 실기 시험을 망쳤거든요. 그때
담임 선생님과 부모님께서는 성적에 맞춰 갈 수 있는 대학들의 리스트를 뽑아 이 곳들에 지원해보자
하셨었는데 저는 탐탁지 않았어요. 대학에 가면 4년을 그 한 분야에 몰두해서 공부해야 할 텐데 생각에 없던
주제를 공부하는 데에 4년을 쓸 마음도, 용기도 없었거든요. 그렇게 4년을 공부한 뒤에는 뭘 할 수 있을까
싶었어요. 부모님께 안 간다고 말씀드렸죠.
대학을 진학하지 않아, 저에게는 친구들에 비해 자유 시간이 많아졌어요. 아르바이트해서 여행 가고, 다녀온 다음 또 아르바이트로 돈 모아서 다시 여행을 가는 생활을 반복했어요. 편의점, PC방, 카페, 음식점 등 할 수 있는 아르바이트는 다 해본 것 같아요. 대학을 안 가서 시간도 많으니까 풀타임 근무가 가능하잖아요?
월급이 100만 원 이상 나오니까 모았다가 어디 여행이 가고 싶으면 바로 떠났었죠.
행선지는 대부분 제주도였어요. 광주공항 제주도 편 항공기가 굉장히 쌌거든요. 평일에 맞춰 가면 왕복 2만원에도 다녀오고 그랬었어요. 제가 특히 협재, 금능 쪽 바다를 좋아해서 제주도에 가면 그 장소들엔 꼭 들렀어요.
그런 뒤에는 혼자 무인도를 들어간다던지 외지를 돌아다니는 걸 좋아해서 뽈뽈거리면서 사진 찍었고요.
21살 쯤까지 그렇게 지내다가 22살 때부터
*국립아시아문화전당(ACC, Asia Culture Center)에 자주 방문했어요.
전시 테크니션 과정과 융복합문화기획자 수업들을 듣기 위해 갔던 건데 공부하면서 또 일도 많이 했었죠.
해외작가 설치 보조하는 일도 했고 음향 보조강사도 했고, 또 ACC에서 수업을 듣던 저와 같은 사람들 중에서 기획서를 선별받아 해외 인턴십을 보내주는 제도가 있어서 그걸 이용해서 유럽에도 다녀왔어요.
‘프로젝트랩’이라고 기획서를 내서 전시를 지원받을 수 있는 제도가 있어서 지원했고, 전시도 자그맣게 했어요.
사실 21살 때 개인적인 일 때문에
힘들어서 잠시 집에 틀어박혀 지냈어요.
하지만 나는 사람을 좋아하는 사람이라, 사람을 만나지 않아도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사람을 좀 만나야겠다, 이왕 만날 거 공통 관심사가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전당 수업을 신청해서 갔던 거였어요. 그렇게 가서 이것저것 접하다 보니 순수예술이라고 하는 것들의 이론적인 배경을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23살 때 대학 입시를 준비해서 24~25살 대학을 다녔죠.
빨리 다니고 싶어서 학점은행제를 이용했어요. 편입요건을 맞춰놓은 다음 편입으로 입학해서 전공 수업들만
딱 듣고 나왔거든요. 그렇게 26살에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제가 다닌 학교의 졸업 전시는
전시와 비평문 작성을 동시에 해야 했어요.
전시 기획을 하고 작가 컨택하고, 보험이나 운송이나 홍보 등 일들을 다 처리해내야 하는 과정이었어요.
그렇게 다 하고 나면 내가 선택한 작가의 비평문까지 작성해야 졸업을 하게 되는 거였죠.
저는 작가로 디자이너 한 분을 섭외했는데, 사실 교수님들 성향에 따라서 디자이너를 작가로 보지 않는 분들도 있었기 때문에 리스크가 있는 선택이었어요. 하지만 그때 저는 디자이너가 만든 작품들에 자신의 철학이
있다면 충분히 이 바운더리로 들어올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알아보다가 찾게 된 분이 채수원 디자이너님이었어요. 신소재 개발을 해서 본인이 만든 소재를 가구 형식으로 제작하는 분이셨어요. 그 소재를 만들어
온 역사, 재료의 선택 이유와 같은 것들이 타당하다고 느낀 부분이 많아요. 전시 주제도 지속가능성에 관한 것이었고요.
*애니마(<Ocragela_Anima, 2021>, ‘오크라겔라’란 붉은 황토, 젤라틴, 글리세린, 물 등으로만 이루어진 물질이다)라는 시리즈였는데 작가가 만든 소재로 동물 형태의 가구를 만드는 작업이었어요. 젤라틴도 도축하고
남은 것들, 잔여물로 만들어지는 방식이어서 생명을 빼앗은 뒤 다시 그들의 형태로 재창조하는 맥락의 작업을 하는 것이었죠. 원래 네덜란드를 거점으로 활동하시는 분이었는데 마침 타이밍이 좋게 서울갤러리에서 전시를 하고 계셨고, 작품들이 한국에 있어서 가능하다고 하셔서 할 수 있게 되었어요.
졸업생 신분이 되니 더 많은 걸
해볼 수 있겠다는 마음이 생겼어요.
이런저런 프로젝트에 지원해보다가 한국콘텐츠진흥원에서 하는 ‘실감형 콘텐츠 창작자 양성’ 과정에 선정돼서 서울에 오게 된 거예요. 20명을 선정해서 다섯 개의 팀을 이룬 다음 작품을 만들어 전시까지 올리는 프로젝트였는데 달마다 140만 원 정도의 활동비 지원과 전시를 위한 창작비 지원을 따로 해주는 사업이었어요. 그래서
서울에 올라가서 지내면서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 거였죠.
프로젝트가 합격일자 바로 일주일 후부터 시작이었는데
그때 저는 가족들과 함께 무주산골영화제에 있었어요.
아버지께서 퇴직하신 지 얼마 안 됐고 엄마도 꽃집 정리하시고 해서 부모님이랑 같이 많이 돌아다니던
시기였거든요. 문자 받고 “엄마, 나 합격했어. 집 구해야 돼!” 하고선 바로 무주에서 서울로 올라와서 집을
하루 만에 구하고, 다시 나주 내려와서 짐 싸서 올라갔어요.
원래는 6개월의 프로젝트 기간이 끝나면
다시 내려갈 생각이었기 때문에 서울에서 지낼 곳도 딱 6개월 동안만 계약했었어요.
그런데 12월에는 어떻게 연결이 돼서 연극 오퍼레이팅 일을 하게 됐고, 그때 언니가 넣어보라고 해서 넣었던
청년주택이 돼버렸어요. 작년 9월부터 올해 3월까지는 한국콘텐츠진흥원의 또다른 프로젝트에 돼서 팀 작업을 했어요. 전시 프로젝트였는데 이건 전시에 관련된 지원금만 지급하는 일이라 아르바이트와 병행해야 했어요. 그렇게 2~3월에 전시를 한 뒤에는 갤러리 인턴을 하면서 올해 6월까지를 보냈고요. 8월부터는지역문화재단
산하기관 중 하나에서 일하고 있어요. 지역 문화는 사실상 처음 접하는 영역이지만, 저에게 맡겨지는 일을
잘 해보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저는 조금은 건강하지 못한
작업방식을 갖고 있는지도 몰라요.
원래 제가 저의 생각, 고민, 걱정거리들을 타인과 잘 나누지 못하거든요. 혼자 꾸물꾸물 품고 있다가 도저히
안 되겠을 때에 그걸 작품으로 내놓게 되는 거예요. 그런데 이제는 항상 내가 무언가 만들어서 내놓으면 볼
사람이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그러면서 어느 순간 스스로 정리가 되더라고요. 어떤 기승전결을 챙기게
됐어요. 결론은 항상 “그래도 잘 살아지겠지.” 이거예요. 남들도 이런 이야기들을 들여다볼 때 그들만의
해석으로 힘을 받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힘들 때마다 도피 여행을 떠나서 바다를 보고 오곤 했어요.
그럴 때면 왜 힘겨운 시기가 오면 바다를 찾게 될까, 왜 바다를 보고 난 뒤엔 조금 괜찮아질까 하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어렸을 때 바닷가에 살았기 때문에 익숙해진 어떤 것, 자연을 보면서 마음이 정리되는 그런 느낌을 저의 작업 안에서도 만들어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창작을 처음 시작할 때의 방식이 배설과 같은 것이었다면, 그걸 제 나름대로 정리하면서 만들어 온 방식이 지금의 결론이 된 거예요.
아직 저는 고민하는 중이고, 답을 찾지 못했고,
작업을 하면서 삶도 함께 영위할 수 있는 사람들을 부러워해요.
그래서 지금의 저는 80%입니다.
창작지원금을 받아야지만 전시를 오픈할 수 있는 형편이고, 그래서 직업을 구해야 하는데 아직은 경험 삼아서 갤러리 인턴도 해보고 문화재단 산하기관에서도 일해보고 있는 것 같아요. 앞으로 제 목표는 매개자 역할을
하면서 자기 작업도 할 수 있는 사람이지 않을까 싶어요. 제 성격도 그렇고 지금까지 해온 것들의 위치도
매개자와 창작자의 사이 정도 위치에 있었다고 생각해서요. 또, 나중에 완전 늙어서는 게스트하우스 사장님
하고 싶어요. 제주도에서요. 완도에서 해도 좋을 것 같고, 아무튼 바다에서요.
대중적인 명성을 얻는 것에 대한 욕심이
일절 없었다고 하면 거짓말이고,
‘언젠간, 그래도, 혹시나’ 정도의 마음으로 욕심이 있었어요.
하지만 요즘에는 언젠간? 하는 생각도 딱히 들지 않는 것 같아요. 내가 하고자 하는 걸 묵묵히 하고 있을 때,
어쩌면 유명해 질 일도 있겠지, 하는 정도의 생각을 갖고 있어요. 거대한 명성을 갖게 되는 건 대중적이어야
가능할 것 같은데 제가 대중 친화적인 사람은 아닌 것 같기도 해요. 만약 내 마음이 편치 않은 상태로 만든
작업으로 유명해진다면 스스로에게 당당할 수 있을까 싶기도 하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처럼 팀 활동이든
프로젝트든 계속 하면서 결 맞는 사람들도 만나고, 배우고, 하고 싶은 재밌는 작업들을 계속 더 많이 할 수 있으면 좋겠어요.
사회적인 지원 시스템이요?
지금 저는 잘 되어있다고 생각해요. 복지재단도 잘 돼있고 서울문화재단에서 하는 공모사업도 이번에 더 많이 세분화되었더라고요. 신진과 진입, 중견 예술가들을 위해 전부 배분이 잘 돼 있어서 써보면 좋겠구나, 근데 나는 안 쓰고 있구나(웃음).
제가 지금 일하고 있는 센터에 교육 프로그램이 엄청 많아요. 초등학생부터 청년 교육, 시니어 교육까지 있죠. 다 들어가서 모니터링을 하는데 나이대 별로 인간 군상의 특징들이 다양하면서도 큰 틀을 가지고 있구나 생각했어요. 그 특징들이 정말 재밌어요. 제 습관이기도 한데, 노트에 혼자 정리를 해요. 이 나이대엔 이런 것들이 필요하고, 살아가면서 어떤 것들을 깨닫고 영향을 받으면서 이렇게 되는 거구나 하는 것들을 정리하고 있거든요.
그러면서 내린 결론 중 하나가 사람은 원래부터 자신이 하고 싶어하는 말들을 가지고 있고 그 말의 ‘소리의
크기’를 낮추면서 배려하는 걸 배워가는 것이다, 그리고 적정한 소리의 크기를 유지할 수 있는 것의 힘은
체력과 배려라고 느꼈어요. 그래서 어떤 작업을 하면서든 항상 배려를 잊지 않으려고 이렇게 스스로 되뇌어요. “고이지 말고, 썩지 말고, 잘 흘러가야겠다.”
미래의 나 자신에게.
서울 처음 와서, 자기 작업을 완성시켜 공유하는 사람들을 만났을 때의 그 신선함을 고이고이 기억하자.
엄청 복잡하게 혼자 생각만 하고 있다가 실제로 행하고 있는 사람들을 눈으로 마주하니까 모든 것이 깔끔하게 딱딱딱 정리가 됐었잖아. 앞으로 네가 하고 싶은 일에 대해서도 그 깨끗해진 감각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