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울 인터뷰

💬 2024 INTERVIEW  |  김민호

"작품을 공개하는 방식도 정형적인
대중음악가들의 방식과 조금 달랐죠."

초등학교 4~5학년 때 친구가 MC몽 노래를 들려줬어요.


어딘가 음악같지 않은 게 또 되게 음악같아서 신기했는데 어떻게 하다 보니 곧잘 따라 부르게 돼서 흥미를 느끼게 됐어요. 익숙한 구절은 그냥 따라 부른 거였는데 애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더라고요.


힙합 음악이 욕설도 가사에 많이 들어가고, 

원초적인 느낌의 장르잖아요?


지금부터 15년 전쯤인 그때는 더욱 그런 러프한 가사의 대중가요가 많이 없었으니까 어린 마음에 참 신기했죠. 저희 아버지께서 고등학교 교사셨어요. 상당히 보수적이고 엄격한 가정이었는데 그래서 오히려 어떤 반항심을 분출하거나 저를 표현해내고 싶은 창구로써 음악을 계속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3학년 때 아버지께서 돌아가셨어요.


중학생에게는 삶이 무너지는 것 같은 일이었죠. 아버지가 계실 땐 제 장래희망이나 이런 것들도 거의 정해져 있었어요. 제가 아버지를 따라 선생님이 되길 바라셨거든요. 과목마저도 아버지와 마찬가지인 과학, 생물 선생님이 됐으면 좋겠다고 하셨죠.


그런 과정 속에서 어떻게 보면 구멍 하나가 뚫렸고, 저라는 사람의 정체성도 재조명하게 됐어요. 저 스스로도 그 당시에는 좀 어지러운 친구였다고 생각하는데 그 일을 겪으면서 음악에 더 빠지고, 가사를 쓰게 되고, 

또 녹음을 해서 세상에 아웃풋을 내놓아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대학도 결국 음악 쪽으로 

가게 됐어요. 자퇴하긴 했지만요.

당시에는 랩, 힙합 전공이 있는 학교가 몇 없었어요. 


찾아보다가 한국 콘서바토리, 지금은 한국국제예술원의 뮤직프로덕션과에 들어갔어요. 

뮤직프로덕션과 안에 랩, 힙합 전공이 있었거든요. EDM 전공도 있었고요. 학교 안에는 거친 친구들이 많아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어요. 저는 힙합이라는 문화가 누군가에게 배워서 얻는 것보다 몸으로 부딪히면서 

얻는 게 더 많다고 생각해요. 같은 음악을 하는 사람과 친분을 만드는 목적이라도, 이 학교를 다녀서보다 

차라리 개인 레슨을 받는 게 오히려 좋겠다는 판단도 있었고요.

1학년까지 다니고 자퇴를 해서 

홍대 쪽에서 음악활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JJK라는 언더그라운드 신에서 유명한 래퍼 분한테 배우면서 따로 공연을 한다든지, *사이퍼(Cypher, 한 무리의 래퍼, 힙합 아티스트, 브레이크 댄서 등이 모여 돌아가면서 즉흥 퍼포먼스를 선보임)라고 해서 프리스타일 랩을 하기도 하면서 지냈어요. 이때는 작업물을 내는 것보다 힙합이라는 라이프스타일을 받아들이는 데에 

초점이 더 맞춰져 있었던 것 같아요.

작품을 공개하는 방식도 정형적인 

대중음악가들의 방식과 조금 달랐죠.


*믹스테이프(Mixtape, 주로 랩, 힙합, 레게 등의 음악 장르에서 기존 가수의 곡을 리믹스하여 길거리 등에서 

판매하는 카세트 테이프. 또는 현대에서 CD나 음원사이트가 아닌 온라인 상으로 무료 공개되는 앨범)를 

낸다든지, *사운드클라우드(Soundcloud.com)라는 무료 음원공개 플랫폼에 업로드한다든지 하는 식이었어요. 

기본적으로 아르바이트로 수입을 얻으면서 음악은 내 음악을 한다는 걸 깔고 가는 느낌이었죠. 

그때 저는 그냥 홍대 걸어다니는 것도 ‘나 래퍼니까’ 하면서 다녔고 어떤 생활의 모든 부분을 저라는 

아티스트의 활동으로 여겼어요.

스물 넷 정도까지 홍대에서 활동하면서 

믹스 엔지니어링이라는 걸 또 따로 배웠어요.


대학 들어가기 전부터 배웠으니까 거의 랩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믹싱도 같이 배웠던 것 같아요. 저희가 사진을 찍으면 포토샵으로 후작업을 예쁘게 하잖아요? 그런 것처럼 노래나 악기도 녹음하면 보정을 하고 후반작업을 하는 거죠.


랩만으로는 돈을 못 버는 경우를 너무 많이 봤고 랩으로는 주변에서 다들 “다 알바하면서 랩하는 거지, 그게 

당연한 거지.” 하면서 누군가 그냥 자신을 알아봐주기만 기다리는 모습들이 제 눈에는 보였던 거였어요. 

그렇다고 제가 막 혜안이 있어서 나는 그럼 엔지니어 쪽으로 빠져야지 이런 건 아니었고 믹스 엔지니어를 하면 돈을 어느 정도 벌 수 있다고 해서 배우기로 마음을 먹었던 것 같습니다.

내가 마법사가 된 것 같았죠. 


결과물을 예쁘게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만족감을 느꼈어요. 엄청 이상하게 녹음된 것 같은 트랙에다가 

*이큐잉(Equalization, 오디오 신호 내의 다양한 주파수 대역의 볼륨을 조정하는 작업)을 한다든지 아니면 

혼자만 튀는 엄청 큰 소리가 있을 때 다른 소리들이랑 어떤 평균값을 맞춰서 작업해 준다든지 하는 거예요. 

그러면 비포 애프터를 봤을 때 이렇게 만들 수 있구나, 의사 같기도 하고 마법사 같기도 하다. 이런 생각이 

들어서 계속 흥미가 생기더라고요.


하지만 동시에 그때는 내가 

잘 가고 있는 건가 하는 고민도 컸어요.


지금이야 믹싱도 하고, 아트워크 제작도 하고 이런 것들이 정리가 잘 돼서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잘 찾아왔다는 생각이 들지만요. 저 친구가 저런 거 하면 따라가고, 내 것이 없이 뭐가 잘 나간대 하면 그거 해보고. 

“너의 색깔이 뭔지 모르겠다.”는 피드백을 굉장히 많이 받았어요. 스스로에게 충분한 재능이 없다는 생각도 

많이 하게 됐죠.


누가 알아봐주는 사람도 없고 잘 보이고는 싶은데, 항상 그런 긴장을 하고 있으면 녹음도 잘 안 돼요. 

항상 긴장 상태에 있었어요. 나는 음악에 되게 진심이었는데 음악을 할 때마다 부담이 느껴졌죠. 

내가 생각하는 완벽한 어떤 작품을 만들고 싶은데 안 나오고, 가사도 안 나오고, 사람들한테는 잘 보이고 싶고... 부담에 부담이 쌓였어요.

그러고 나서 1년 정도 아예 음악을 그만뒀어요.


아무것도 안 하고 ‘막노동’ 하면서 지냈죠. 어떤 계획이 있어서 한 게 아니라 그냥 할 게 없어서 그랬던 거예요. 막노동을 하면 아침에 인력사무소를 가요. 가서 커피 한 잔 마시면서 사람들을 둘러 보죠. 

다른 사람들이 저를 어떻게 여겼을지는 모르지만 제가 느끼기에는 저랑 결이 맞는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너무 많이 들었어요. 그런데 아침마다 거기 나가 있는 거예요. 매일 아침, 왜 나는 내 삶을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는지 스스로에게 물었어요. 나 왜 이렇게 살지? 결국 1년 즈음이 지나고 다시 음악을 해야겠다고 돌아왔죠. 

제 동생도 음악을 하고 있어요. 


어렸을 때 같이 음악을 좋아했었고 CD 플레이어로 좋아하는 노래들 돌려 듣고 그랬었거든요. 

동생은 밴드 음악을 하고 있는데 시작한 시기는 저랑 비슷해요. 차이가 있다면 동생은 뭐 하나에 꽂히면 

자기만의 세상 안에서 그걸 끝까지 파고드는 성격이고 저는 사람, 사람 만나는 거, 얘기하는 거 좋아하는 

타입이거든요. 그렇다 보니 상대적으로 나도 똑같이 음악을 좋아하는데 어쩌면 내가 음악에 대해 노력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겠다. 열심히 한다고는 하는데 가사가 안 써진다는 핑계라든지, 쓸데없는 핑계를 들며 

또다른 쓸데없는 것들을 하게 되는 시간들이 스스로 계속 아쉬워졌어요.


그러다 보면 늘 돌아오는 

생각이 앨범을 만들어야겠다는 거였죠.


어떤 앨범을 만들지 구상해서 곡의 리스트도 다 짜 놨는데, 이렇게 머릿속 그림만으로 구상을 하면 정작 

그 곡들을 실제로 만들고 싶은 흥미가 동하지 않아요. 이런 건 대체 뭘까, 왜 이렇게 게으른 삶을 살까, 

왜 영감이 아직 떠오르지 않는다는 변명을 반복해야 할까 고민했어요. 당시에는 유니클로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지내던 때였는데 퇴근하자마자 술을 달고 사는 한심한 생활을 반복했죠. 어쩌면 이건 내가 진짜 하고 싶은 얘기가 아닐 수 있겠다는 걸 알게 됐어요.


스스로를 바꾸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랑은 무엇인가, 가족에 대한 이야기, 아버지를 정말 사랑했지만 너무 무서웠던 어린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어요. 내 사람들을 너무 사랑하지만 멀어져야 할 때가 있었던 그런 이야기들을 한 데 모아 작품을 만들어보면 좋겠다. 그렇게 해서 결국 앨범을 만들었어요. 전곡을 사운드클라우드와 음원사이트에서 들어보실 수 있어요. ‘베르실컨 (bear silcon)’라는 이름으로 올라가 있습니다. 


437이라는 이름을 썼었는데 요즘 숫자로 이름을 쓰시는 분들이 많아졌더라고요. 

이름을 기억하기 어렵겠다 싶어 이름을 바꾸려던 찰나 Chat GPT로 이름을 지으면 재밌겠다고 생각했어요. 뚝하면 딱하고 멋진 이름을 만들어줄 줄 알았는데 그렇진 않더라고요. 수많은 추천을 받아 결국 프랑스 어로 실버를 뜻하는 ‘bear(베르)’와 의미는 없지만 날카로운 느낌을 줄 수 있는 ’silcon(실컨)’을 추천 받았습니다. 웃긴 건 ‘bear’라는 단어는 프랑스어에서 실버라는 뜻이 없더라고요. Chat GPT의 실수였죠. 즉, 이 이름은 전혀 의미가 없는 이름인 거예요. 이 마저도 재밌는 에피소드라고 생각이 들어 이 ‘bear silcon(베르 실컨)’이라고 이름을 정했어요. 

조금 나이를 먹고 군대를 갔다 보니까 

복무기간 동안 나를 쌓을 수 있는 것들을 하고 싶었어요.


책도 많이 읽고 공부도 많이 했어요.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고민하면서요. 여전히 예술가가 되고 싶었지만, 현실을 챙기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죠. 그래서 전문하사도 지원해서 군생활도 남들보다 길게 했어요. 전역하면서는 음악 작업하면서 동시에 생활체육지도사 자격증도 공부해서 지금은 성수 쪽에서 

트레이너로도 일하고 있습니다.

군대에서 했던 생활을 나와서도 

지속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운동도 그렇고 독서와 일기 쓰는 것이라든지... 전역하고 나와서 그래서 독서모임도 만들었어요. 나는 사람들을 좋아하고 커뮤니티를 만드는 걸 잘 하니까 그 장점을 살렸어요. 왜 난 이렇지 하고 생각하던 걸 바꾸면 그게 

제 메리트가 되더라고요. ‘매일 작업 챌린지’라고 해서 예술가 분들을 모아서 하루하루의 작업을 서로 나누고 한 달에 한 번씩은 월간 총평을 하는 모임도 하고 있어요.


요즘은 힙합음악 쪽으로 컴피티션이 

활발하게 있어서 지원해보고 있습니다.


또 SNS가 아무래도 대중들이 접하기 쉬운 매체니까 숏폼 콘텐츠를 만들려는 노력도 하고 있어요. 이제 전역한 지 2~3년이 되었는데 체육으로 돈을 벌고 있지만 안정적인 수입에 기대서 발전이 없는 상태로 머물러선 안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믹스 엔지니어링처럼 조금 더 음악으로 돈을 벌 수 있는 기술로 내 사업을 만들 

계획도 하고 있어요. 그래서 무료로 작업해 드립니다 하면서 마케팅도 하고, 그렇게 세 곡 정도 믹스 작업을 

하고 난 다음부터는 먼저 의뢰가 들어오기도 해요. 


*팀버핏(신체기능 향상을 위한 운동 프로그램을 기반으로 한 그룹 트레이닝)이라든지 활동적인 프로그램들이 생기면서 체육관들에서도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많이 활용해요. 아무래도 제가 믹싱 기술도 있고 영상편집도 할 줄 알다 보니까 영상에 맞게 음악 플레이리스트를 만들어서 배급하는 사업 구상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차일디시 감비노 같은 아티스트가 되고 싶어요. 


*심슨 가족(, 1989~)의 작가이기도 하면서 랩도 하고, *스타워즈(, 2018)에 나와 연기도 하고, 엄청 다양한 

활동을 하는데 그 사람만의 색깔이 뚜렷하게 있는 아티스트라 여겨지죠. 저도 제가 무엇을 하든 그런 아웃풋을 낼 수 있는 사람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아트워크 제작을 시작한 것도 어쩌면 그런 맥락이었을 거예요.


사진 찍는 걸 어릴 때부터 좋아했는데 쿤디판다라는 래퍼 분이 본인이 작업한 아트워크들을 SNS에 올리시더라고요. 재밌어 보이기도 하고 저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앨범 제작할 때 아트워크 외주 안 맡기고 내가 하기만 해도 30만 원씩은 아끼겠다 싶어서 시작한 것도 있고요. 위에 말씀드린 사랑에 관한 

이야기로 채워졌던 앨범인 도 LOVE를 거꾸로 해서 직접 제작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관련이 있는 그림 같은 것들을 종이를 꾸겨서 사랑 모양, 하트 모양으로 만들었어요. 그리고 그걸 불태우는 과정을 아트워크로 

제작해 활용했죠. 형태를 바로 알아보기는 쉽지 않아서 이거는 아마 작업자만이 알 수 있는 의미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이후에 제가 만든 아트워크들을 NFT로 만들어서 전시도 네다섯 번 했어요.

지금은 한, 20% 정도?


랩을 공부하고 작업하다 보니 계속 제 마음이 더 스며들었어요. 예전에는 그저 관심을 받고 싶었고, 어떤 사람들을 동경하는 마음에 멋있다 싶은 것들을 따라갔던 것 같아요. 지금은 내가 무엇을 얘기하고 싶은 건지 오랜 고민을 통해 내 스스로가 되는 게 가장 멋진 일이라는 걸 느끼게 됐어요.


아티스트가 작업만 하는 게 아니라 영업을 잘하는 것도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예술도 상품이잖아요? 가령 어디 전시에 내 작품을 걸려고 해도 결국 내 작품이 유명해야 한다는 것도 한몫을 하죠. 사람들이 나에 대해서 모르면 아무리 좋은 작품을 만들어도 팔기가 쉽지 않고요. 그래서 수익화를 시키는 것에 목표를 두고 내 상품이 얼마나 멋지고 자랑스럽고, 또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지 알릴 수 있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20대 초반 우리들의 무리가 사람들이 알아주기만을 기다리던 기억 속 모습들이 제게 크게 남아 

있어서 지금은 내가 발로 뛰어야 먹고 살 수 있겠다는 생각이 더 많아졌어요. 특히 서울에 오니 그 생각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청년예술가들의 공유 작업공간이 

더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요. 


청년예술청, 청년지원센터 같은 공유오피스가 지금 제가 사는 종로에는 없거든요. 여기저기 문의도 넣어 

봤는데 관련 담당자도 자기도 너무 만들고 싶은데 위에서 장소를 주지 않는다고 하더라고요. 이유가 종로는 

청년층이 많이 살지 않고 노인 인구가 더 많기 때문이래요. 또 청년들이 사용할 수 있는 공유오피스를 만들려고 하면 지하철로 올 수 있는 곳으로 바로 들어가야 되는데, 그런 조건 때문에도 더 많이 만들기가 어렵다고 해서 그래도 납득이 되었습니다.


미래의 나 자신에게.


나는 요즘도 “하사 김민호”라는 말을 혼자 가끔 해. 자존감이 낮아지거나 주눅 들 때 말이야. 군 입대 전이 너무 힘들어서 군대에 가서부터는 정말 열심히 노력했고 내 삶을 바꿔나가고 있어. 너도 아직 잊지 않았지?


그래도 그만큼 성장했는지 지금 굉장히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어. 사실 그렇게 잘 벌진 못해도 나 자신이 이렇게 열심히 살고 있다는 게 굉장히 뿌듯해. 이런 하루하루를 기록할 수 있는 것도 좋고. 또 지금보다 과거의 내 모습도 그렇게 밉지 않아. 엄청 마음에 들진 않지만, 걔가 그렇게 살아남아 주었으니까 지금의 나도 있는 거잖아. 너한테도 지금 내가 이렇게 산다, 살고 있다고 얘기해주고 싶어. 잊어버리지 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