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울 인터뷰

💬 2024 INTERVIEW  |  박지범

"악보에 기입하는 게 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음표 하나라도 허투루 쓰면 안 돼요."

저는 조기 유학으로 상하이에 갔어요. 


중 3에서 고 1 넘어갈 때 동생과 함께 갔다가 동생은 못 있겠다 해서 돌아오고 저는 계속 거기서 공부했죠. 

아버지께서 조금 혜안이 있으셨던 것 같아요. 지금이야 코로나 이후로 조금 달라졌는지 모르지만 당시에는 

중국이 뜬다 뜬다 하던 때였거든요. 3월에 가서 6개월 정도 중국어 공부하고 국제학교에 들어갔어요. 거기서 

조금 공부하고, 나중에는 아예 로컬 학교로 전학을 했습니다. 대학은 상하이교통대학에 입학해서 열 에너지 및 동력공학 분야를 공부했어요. 

학사를 마치고 바로 귀국해서 회사를 다녔습니다.


대기업에 취업해서 코로나 시기가 오던 2020년 3월 즈음까지 거의 5년을 일했어요. 퇴직하고는 2년 동안 작곡과 입시를 준비해서 음대에 입학했죠. 19년도 초반에 이미 계획이 다 있었어요. 내가 얼마 정도 돈을 모으면 

작곡을 배우고 입시로 얼마를 써서, 그 동안 생활비를 어떻게 쓰고 하는 것들이요. 원래 21년도 퇴직할 

계획이었는데 20년도에 코로나가 터진 거예요. 자동차, 그 중 전기자동차의 에어컨 있죠? 동력에 관한 

일들인데 그걸 이제 컴프레셔라고 그래요. 그때 전동 컴프레셔 부서가 다른 사업부로 넘어가면서 그 인원을 

리하라고 된 거예요. 회사 측에서는 한 천오백, 이천만 원 더 줄테니 퇴직할 사람이 있으면 지금 퇴직하라고 나왔고 그게 저에게는 맞춤 조건과 같았죠. 

회사에서 일하는 동안에도 저는 돈을 엄청 써서 

사외 클래식 강의를 들으러 다녔어요.


클래식을 더 공부하고 싶은 마음, 또 그 다음으로 이 아름다운 클래식 음악을 사람들이 함께 향유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죠. 그런데 강의를 들을 때마다 실망했던 거예요. 시간 당 10만 원 짜리도 가보고, 어떤 유명한 

음악가가 와서 한다고 해서 또 가보면 위키만 쳐도 나오는 정보들을 얘기하고 끝이었죠. 근본적으로 저 사람들이 일반인에게 다가가는 방법을 좀 모르는 걸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사람들이 다비드 상 같은 작품들을 보면서 예쁘다, 

멋있다 하고 그러는데 저는 나아가서 그게 왜 멋있는 건지 알고 싶단 말이에요. 


남들이 멋있다 멋있다 하니까 멋있는 건지, 어떤 분명한 이유가 있는 건지에 대해 원래부터 관심이 있었어요. 지적 호기심이 있었던 거죠, 특히 예술적 가치 측면에서.

클래식 음악은 처음에는 당연히 허세로 들은 거였어요.


군 입대 전, 2008년에 대학교에 들어갔을 때부터였을 거예요.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플레이리스트가 다 클래식 음악으로 차기 시작했어요. 이제 돈이 생기니까 실제로 들어보고 싶더라고요? 들으러 갔죠. 좋은 연주들 혼자서도 막 들으러 가고 그랬어요.


*베를린 필(Berliner Philharmoniker, 독일의 수도 베를린을 거점으로 하는 관현악단. 베를린 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 온다, 그러면 해외에서는 C석이 제일 싼 게 10만 원인데 국내는 제일 비싼 자리가 10만 원이고 그랬어요. 그 차이도 뭔지 알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사외 강의를 다니고 회사에서 동아리도 만들어 봤는데, 다들 음악 듣고 “천상의 소리예요!”, “진짜 천국에 있는 것 같아요!” 이런 감탄만 하는 게 저는 너무 별로였어요. 그것도 물론 중요하지만 저는 왜 그렇게 느꼈는지가 궁금한데 아무도 설명을 안 해주더라고요.

더더욱 문헌과 연구를 파고 들 수밖에 없었어요. 


화성학을 배워야겠다 싶어서 혼자 화성학 교재를 사서 공부했는데 일주일 만에 포기했어요. 

혼자 배울 수 있는 게 아니더라고요. 작곡 전공을 하는 대학 1학년 정도의 선생님을 구해서 레슨을 받았죠. 

1년 정도를 배우는데 그 분도 신기했나봐요. 이렇게 화성학 푸는 걸 좋아하는 사람은 처음 본다고, 혹시 전공을 해볼 생각도 있느냐며 추천했어요. 원래는 평생교육 쪽으로 알아봤는데 작곡을 그렇게 공부할 수 있는 곳이 

마땅치 않았대요. 그래서 4년제밖에 없다, 한 번 도전해보셔도 좋겠다 하는 거였죠. 저는 혹시라도 선택을 

잘못하면 안 되니까, 그때는 고민이 많이 됐어요. 

그때 회사 분위기가 조금 군대 문화도 있었고, 

일도 힘든 편이었어요.


그래서 더 클래식에 빠져서 이런 생각을 하나 싶었죠. 퇴사 관련 책도 두세 권 읽으면서 고민했어요. 

책에서 정말 저 자신이 그 새로운 일을 하고 싶은 건지에 대한 질문들을 얻었어요. 냉철하게 기저에 깔린 

감정까지 파악을 했는지, 행복한 일들만 일어나지 않아도 괜찮은지, 또 그 일로써 생산적인 활동을 하고 

돈을 벌 수 있는지 생각해봤어요.

결론은 제가 하고 싶은 일이 있고, 그걸 위해서 

희생하거나 감수할 수 있기 때문에 퇴사할 생각을 한다는 것이었죠.


내 길이 맞다는 생각이 확고해진 후에 부모님께도 말씀드렸어요. 집에서는 난리가 났죠. 이모가 어머니께 

전화로 지범이가 잘 때 망치로 무릎을 부러뜨리라는 얘기까지 했다더라고요. 그래도 계속해서 확실히 말씀을 드리고 설득해서 부모님께서도 인정하셨어요. 무엇보다도 제 돈으로 한다고 했거든요. 회사 다닐 때 어머니께서 쓰시도록 50만 원, 30만 원 매달 쓸 수 있는 신용카드도 드렸었어요. 이런 걸 가지고 부모님께 갚을 만큼 

갚았다고 하긴 그렇지만 나도 어느 정도는 했으니까 나 하고 싶은 일을 해보겠다 말씀드린 거죠.

사실 점점 더 자신감을 얻어요.


예전에는 어떤 음 하나를 눌렀을 때 청음도 안 됐어요. 입시를 할 때도 커트라인이 가장 낮은 곳을 골라서 제발 여기 한 곳만 붙어라 하는 느낌으로 했었고요. 물론 대학은 되게 좋아하고 잘 왔다고 생각하지만요. 들어와서 좋은 교수님들도 만나고, 여기저기 연구하던 거 막 메일로 보내고 그래서 세미나도 많이 초청받고 있어요. 대학원도 내년에 시험을 칠 거고, 합격할 자신도 있습니다.


입시할 때 왜 서울에 있는 대학은 엄두도 못 내던 애가, 나중에는 조금 더 노력하면 턱걸이로 ‘인서울’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했다가, 또 더 시간이 지나서는 나는 ‘스카이’ 아니면 안 가 하는 식으로. 자연스럽게 저의 목표가 성장하는 느낌을 받아요. 요즘 너무 잘 지내고 있거든요. 천직이 맞나 봐요.

대학에 들어갔더니 저 빼고 다 스무 살이에요.


처음에는 삼촌이라고 하기에도 애들이 미안했는지 선생님, 선생님 그랬어요. 삼촌이라고도 부르다가 한 명씩 오빠, 형 이러다 보니까 이제는 다 형 오빠라고 불러요. 학교 수업은 방식이나 내용이 제 생각보다 다양하지 

않았어요. 대부분 이미 공부해서 아는 내용이기도 했고요. 다행인 부분은 음악대학은 교수님과 일대일로 

진행하는 수업들이 있어서 저는 그 시간을 많이 활용하려고 하는 것 같아요. 혼자 공부했던 거, 궁금했던 거 

다 싸들고 가서 일대일 수업때 질문을 드리면 지도를 해주세요. 혼자 공부를 막 해서 오니까 교수님들도 

좋아하시죠. 


악보를 산 다음 저의 구상을 그때그때 

악보에 어떻게든 표시해놨다가 교수님께 가져가는 거예요.


교수님이 저한테 너는 무슨 음악을 쓰려고 한 거냐 하시면 저는 예를 들어 커피에 대해 쓰려고 했다, 커피 맛을 표현하고 싶었다 이렇게 답을 드리죠. 작곡가 *진은숙(아시아인 최초 ‘클래식 노벨상’ 지멘스 음악상을 

수상한 대한민국의 현대음악 작곡가)이란 사람은 딸기 맛을 음악으로 이렇게 표현했더라 하면서 제가 

말씀드리면 교수님은 그 사람은 이렇게 표현한거고 너는 잘못되게 표현했다 하는 식으로 방향에 대한 

가이드를 주셔요. 대학생활에서 교수님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좀 이용할 수 있는지 요즘 다시 느끼는 것 같아요.



제 인생의 최고 목표는 음악 감상학과를 만드는 거예요.


아직 이름은 확정이 아닌데, 가령 아동학과도 100~150년 전 쯤에는 그걸 따로 연구도 하고 교육해야 한다고 주장했던 사람들이 무시당했잖아요? 아동에 대한 단계별 교육이 학문이 되기까지의 과정이 150년이었다고 생각하는데, 음악도 저는 감상의 영역이 별개 학문의 영역이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내년에 서울대 대학원 입학 지원서를 쓸 생각인데 거기에도 이렇게 쓸 거예요. 제가 한국에서 최고 대학을 들어가서 배운 뒤에 유학까지 가서 지식의 폭을 더 넓힌 다음 다시 음악하는 사람들에게 그 영향력을 돌려줄 생각이예요.


클래식 음악의 주류는 아직 서양이에요. 한국에서 임윤찬, 조성진이 나와도 클래식을 공부하는 사람들은 

어떻게든 유학을 가려고 하죠. 우리가 음악 감상학과를 처음으로 제창해서 만들면 서양음악의 한 부류를 

아시아가, 대한민국이 원조로 갖고 갈 수 있다는 비전이 있어요. 가령 베토벤을 배우겠다 그러면 독일로 

가야 하고, 현대음악을 배우고 싶다고 하면 미국 또는 독일로 유학을 가는 것처럼 미래에 음악감상이라는 것을 배우려면 한국에 가야 한다. 이렇게 만들고 싶은 것이 저의 큰 청사진입니다.

원래의 꿈은 지금보다 크지 않았어요.


학교 강사까지도 안 봤고 프리랜서 강사 정도 생각했거든요. 내가 배움의 시간을 좀 가진 뒤에는 남들한테 

그래도 더 잘 설명할 수 있겠다, 이런 자신감이 있었어요. 베토벤이나 브람스 등 클래식 작곡가들 중 많이 

알려진 사람들은 그들을 분석한 수많은 논문이 발표돼 있어요. 그런 정보들을 저는 일반인들에게까지 쉽게 

전달해 주고 싶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거기에 더해서 현대음악 어렵잖아요. 이걸 설명하려고 하는 곳도 

별로 없어요. 그런데 저는 공부를 하면 할수록 정말 가치가 있는 음악이라고 생각하게 됐거든요. 

그래서 작곡과로 입학하게 된 거고요. 


주변 사람들한테도 저는 “불호도 선택해야 된다”고 많이 얘기해요.


무언가에 대해 좋다 싫다를 얘기하려면 그것에 대해 알아 보고 경험해 본 다음 그것이 싫다고 선택하길 바란다는 뜻에서에요. 저는 클래식 음악에 대해서 음악회에 갈 때 정장에 넥타이 차림이어야 한다거나, 음악의 

이미지가 와인과 함께해야 할 것 같다거나 하는 편견들을 좋아하지 않아요. 사람들이 겪어보지도 않는데 

이미 높은 벽이 있는 느낌이에요. 누구나 겪을 수 있게 한 다음, 사람들이 클래식 음악을 좋아할지 싫어할지 

선택할 수 있게 해줘야 된다고 생각해요.

지금의 전 0%에요. 


아직 학부생이라서 뭘 한 게 없잖아요? 다만 마음가짐만 가지고 말씀드리면 정말로 이미 100%를 초과했다고 생각해요. 작았던 꿈이 계속 커졌다고 말씀드린 것처럼 프리랜서 강사를 해봐야지 했던 사람이 더 구체적인 

목표들이 생기고, 새로운 학문을 만들겠다고 하고 있는 거죠. 어딘가에서 강의를 한다고 하면 그걸 들으러 온 사람들에게 내가 무엇을 주고 싶은 건지도 스스로 알고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요즘도 국제현대음악제 등의 

행사들에 항상 관심을 갖고 찾아다니면서 보고 있고, 그리고 논문들을 찾아보며 학술적인 정보 또한 방대하게 습득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저는 제가 원하는 걸 가능한 한 많이 말하고 다녀요. 


예전부터 음대 갈 거라고 말하다가 진짜 음대에 오게 됐고 대학원을 서울대로 가겠다 말하고 다니니까 정말 

좀 길이 보이더라고요. 앞으로 책도 계속 쓸 거고, 논문도 발표할 거예요. 미국 유학까지 다녀와서는 강사 일을 하면서 학술적인 저의 주장을 쌓아나갈 생각입니다.


그때까지는 아르바이트를 조금 해야 할 것 같아요.


회사 다니면서 벌어둔 돈이 있었지만 2년의 입시준비에만 4,700만 원 정도가 들었습니다. 입시 준비기간 

막바지에 피아노 레슨의 경우 일주일에 3회 정도 진행하거든요. 그게 시간당 레슨비가 10만 원이에요. 

그러니까 일주일에는 30, 달에 120~150만 원씩이 드는 거죠. 피아노만 그런 거고 화성학에, 작곡도 배우니까 비용이 정말 만만치 않았습니다.


회사 생활은 힘들었지만 

그래도 정말 해보길 잘했다고 생각해요.


입사 후 2~3년은 회사 선배가 시키는 일만 하다가 그 이후에 간단한 부품의 설계를 맡을 수 있게 됐어요. 

핵심부품도 아니고, 작은 뚜껑 같은 거 하나 만드는 거였어요.


그 뚜껑으로 닫을 병의 입구 지름이 예를 들면 1.5cm라고 해볼게요. 선배가 뚜껑을 몇 cm로 만들겠냐고 해서 입구보다 조금 넓어야 하니까 1.7cm로 했습니다, 이렇게 대답하면 그냥 혼나는 거예요. “1.8cm는? 1.9cm는 

왜 안되는데?” 이렇게 되는 거죠. 그 다음에는 이 뚜껑을 열 때 가해지는 힘은 얼마가 되어야 되는지 계산해 

보았니? 하면서 점점 세세하게 들어가요.


제가 제작한 그 뚜껑이 영하 50도까지의 저온을 견딜 수 있게 만들었다고 설명하려면 왜 꼭 영하 50도를 

견딜 수 있어야 하는지 설명을 해야 되는 거예요. 또 영하 49도에서 이 부품이 견디는지도 실험해 봤어야 해요. 

일반적으로 영하 50도를 통과하면 당연히 영하 49도도 버티겠거니 생각하잖아요? 모든 걸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준비하고 실행해야 목표가 달성이 된다는 걸 이런 훈련들을 통해 배웠다고 생각해요.


악보에 기입하는 게 제 생각을 

표현하는 것이라면 음표 하나라도 허투루 쓰면 안 돼요. 


남들에게 오해를 줄 수 있는 단어나 표현도 사용하지 않도록 집중해서 작성해야 하죠. 연구개발직에서 

가지게 된 마인드는 음악을 공부할 때에도 똑같이 필요한 것이었어요. 작곡을 할 때 내가 하고 있는 행위의 

의도, 내가 만들고 있는 것의 의미부터 시작해서 많은 생각을 합니다. 내가 만드는 이 작품이 왜 진짜 클래식 

음악이 되는 것인지, 그것을 통해 내가 무엇을 얻고자 하는가에 다가가고자 해요.

미래의 나 자신에게.


너 대신 내가 미리 다 깨질게. 

너는 네가 하고 싶은대로 다 해라. 너처럼 되기 위해서 지금의 나는 정말 많이 깨지고 무너지고 있다. 그렇지만 계속 노력하고 있어. 그래서 너는 걱정없이 하고 싶은 일들 마음껏 하고 살았으면 좋겠어. 


다만 30년 전 지금의 이 마음을 잃지는 말고. 어떤 대의에 개인적인 이유나 정치가 들어가는 순간 결과가 다 

나빠지더라. 어떤 선택을 할 때 가능한 올바른 선택들을 내렸으면 좋겠어. 미래의 지도에서 초심을 잃지 말고,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노력들을 기억해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