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울 인터뷰

💬 2024 INTERVIEW  |  성미

"처음에는 아이들이 제가 이렇게 바쁘고 
계속 어딘가에 가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16살에 길거리 캐스팅이 돼서 연기를 시작했어요. 


명함을 받은 회사에서 카메라 테스트도 해보고, 연기랑 노래 같은 것들을 심사하더니 이미지가 연기 쪽이 맞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배우 해볼 생각이 있느냐고 해서 연기 쪽으로 입사하게 됐어요.


달마다 몇 번씩 레벨 테스트와 카메라 테스트가 있었어요. 연기 선생님도 붙어서 저를 가르치셨고요. 테스트에서 항상 연기 점수는 높게 받았는데 소위 ‘카메라 빨’이 잘 받는 편이 아니었는지 카메라 테스트 점수가 낮게 나오는 편이었어요. 회사를 다니니 주변에 너무 예쁜 친구들도 많고, 자존감이 많이 떨어졌죠. 매체 연기는 내 길이 아니구나 싶어 연극 쪽의 연기로 전공을 돌렸어요.

고3 때 회사가 문을 닫게 됐어요.


마침 저는 회사에 거는 기대는 많이 낮아진 상태였고 입시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크게 마음쓰지 않았어요. 대학교에 연극 전공으로 입학했는데 1학년만 다니고 자퇴했어요.


우선 등록금이 너무 셌어요. 그때는 학자금 대출에 대해서도 잘 몰랐고 집안 형편도 좋지 않아 부담이 많이 

됐죠. 또 학교 수업이 너무 이론 위주였던 것도 이유로 작용했어요. 1학년 때는 거의 이론수업 위주고 2학년에 가서야 실습이 늘어난다고 하더라고요. 저는 연예기획사에서 3년을 ‘현장’ 했다고 생각했고 그때부터도 현장에서 연기하면서 배우는 게 나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딱 결정해서 학교를 자퇴하고 인천에 있는 한 극단에 들어갔어요.

1년 동안 연기로 돈을 벌면서 이게 내 직업이긴 하구나, 

업으로 연기하면서 살 수 있겠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아동극과 마임을 위주로 활동했는데 극단 대표님과 동료들로부터 똑똑한 배우라는 칭찬을 많이 들었어요.

저는 연기하고 싶어서 일찍 결혼한 케이스에요.


극단을 나온 해에 사귀던 남자친구와 결혼했거든요. 극단에 있을 때 여자 선배님 한 분이 임신하셨는데, 그 분이 임신 7개월차까지 공연을 같이 했어요. 아동극 특유의 의상과 분장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죠. 

그 분이 당시 30대 초중반이셨는데, 출산하실 때 “나 빨리 돌아올게!” 하셨거든요. 

그런데 그 다음해에도 돌아오지 않으셨어요.


저는 결혼을 꼭 하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기를 낳으면 경력이 이렇게 끊기는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딱 두 가지 방향을 정했죠. 하나는 아예 일찍 결혼하고 한 서른 돼서부터 쭉 나의 일을 하는 것, 다른 

하나는 아예 결혼을 마흔 넘어서 해야겠다는 거였어요. 그때 남자친구가 일찍 결혼하고 싶다고 해서 

이십 대 초중반에 결혼하는 쪽으로 결정한 거예요.

큰애가 허니문 베이비였어요.


25살이 되기 전에 첫 아이를 낳았고, 원래 둘째 계획도 하고 있었어서 1년 후 다시 아이를 가져서 26살 때 둘째를 낳았어요.


애기를 처음 낳았을 때는 피범벅에, 쭈글쭈글해서 충격을 받았었어요. 예쁘다는 생각이 전혀 안 들어서 저한테 모성이란 게 있는지 고민하기도 했고요. 다행히 그때 남편이 아기 보는 걸 많이 도와줬어요. 시어머니가 베이비시터 일을 하셨어서 보고 배운 게 있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키우다 보니까 아이가 너무 예뻐지더라고요. 

둘째를 낳고도 잘 키울 수 있겠다 싶었어요.

그런데 둘째가 태어나자마자 

심장병 때문에 개흉 수술을 해야 했어요. 


병원비도 많이 나오고, 매번 심장 초음파 검사하러 갈 때마다 진료비가 만만치 않아 시댁의 도움도 받았죠. 

우리나라 법이 성인은 그렇지 않은데 애기가 심장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 건강보험 적용이 안 되더라고요. 

아기가 중환자실에 있을 때 한 번은 심정지가 온 적도 있어요. 지금은 조금 나은데 한동안은 그 “삐-” 소리만 

들려도 너무 불안해져서 의학 드라마도 못 봤어요. 둘째가 병원에는 중환자실에 일주일 정도, 일반 병동에 

2주 정도 있었어요. 흉관을 달고 있었거든요. 큰애는 저랑 한 번도 떨어져 있지 않다가 처음으로 그때 

이별을 했었죠. 

엄마를 뺏겼다는 마음이었을까요? 


둘째 상태가 좋아져서 퇴원을 시켰더니 큰애가 이상행동을 보이기 시작했어요. 

둘째 얼굴을 베개로 덮는다든지, 장난감을 집어던지고 머리를 벽에 박고 그러는데 많이 힘들었어요. 

둘째는 또 심장병이다 보니 울면 안 됐어요. 심장 수술을 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으엥!” 하고 울어버리면 피가 

빨리 돌잖아요? 그래서 우니까 안아서 달래면 큰 애가 울어요. 저도 몸조리를 잘 못해서 너무 아프고 힘든데 

아이들이 둘 다 아파하니까 약간 ‘내가 뭘 잘못했지?’ 이렇게 되더라고요. 

둘째가 다섯 살이 되고, 큰애가 초등학교 갈 

준비를 할 즈음이 돼서야 연기활동에 복귀할 수 있었어요.


둘째 아픈 것도 완치가 가까워졌고 아이들은 어린이집에서 보는 시간이 생겨서 제 시간을 어느 정도 쓸 수 있게 됐거든요. 그런데 이번에는 코로나 시기랑 맞물렸어요. 아동극이랑 무용극 하나씩 해서 두 작품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무용극이 첫 공연을 하기 3일 전, 신천지 사태가 터졌어요. 무용극은 완전히 무산이 됐고 아동극은 

다행히 취소는 되지 않고 인원 수 제한 등의 수칙을 지켜가며 진행할 수 있었어요. 

복귀하니까 다시 처음부터 시작이었죠. 


너무 오랜 기간 활동을 쉬니 요즘 배우들이 연기하는 스타일도 모르고 유행도 몰랐죠. 아이들이랑 있으니까 

아동극만 봐왔고, 성인극은 보지도 못했고요. 그래서 아동극을 하면서 감을 좀 찾은 뒤에 다른 소극장 뮤지컬 같은 공연에 들어갔어요. 이 시기에 남편은 요식업을 그만두고 제 친정 부모님 사업을 도우면서 배우고 

있었어요. 시간이 꽤 여유가 생겨서 제가 연습이 길어지거나 하면 남편이 와서 애들을 봐주곤 했어요. 

수입을 늘리기 위해서 연극 스탭 일을 시작했어요. 


애들이 클 때까지는 어디 나가면 그래도 돈을 벌어야 하겠다는 생각이었어요. 같이 하던 아동극 팀에서 

처음 조명을 배우면서 시작해서 빠른 속도로 터득해나갔죠. 올해부터는 아예 인천의 한 소극장 감독님 밑에서 조명을 배우면서 내년에는 자격증도 딸 계획이에요. 기획자로서 일할 수 있는 기회도 생겨서 프로젝트 팀으로 작품을 두 개 올렸어요. 연극으로 낭독극을 하나 올렸고 다른 하나는 전시를 올렸죠. 팀원들과 뮤지컬도 

제작하고 있었는데 이건 사정이 있어서 잠시 중단된 상태예요. 

처음에는 아이들이 제가 이렇게 바쁘고 

계속 어딘가에 가야 하는 걸 좋아하지 않았어요.


이제는 현장에 제가 조명 감독으로 가게 되면 아이들을 데려갈 수 있으니까, 가끔 데려가거든요. 

또 아까 아동극 팀처럼 오랜 인연을 유지하는 이런 팀이라면 이해를 해줄 수 있으니까 같이 가기도 하고요. 

그러면 또 애들이 엄마 일하는 모습을 보는 거예요. 조명 감독으로 갔을 때는 “너 저거, 젤라틴 빼.” “무대 한 번 쓸자!” 이렇게 시키거든요? 이런 거 하면 또 재미있어 하고, 저도 재밌고. 또 그렇게 하면 애들한테 한 5천 원 

페이 줘요(웃음). 같이 아동극 보고 나서 어땠니 하면서 대화도 나누고요. 

요즘 큰애랑은 동화책을 쓰고 있어요. 


제가 다른 엄마들이랑은 다르지만, 다른 만큼 특별한 점도 있는 것 같아요. 애들도 그 영향을 많이 받고 있고요. 큰애는 저랑 동화책도 쓰고 나중에는 같이 연극도 만들어보려고 하고 있고, 따로는 구립합창단 활동도 하고 

있어요. 둘째는 이제 댄스 동아리에서 활동해요. 이렇게 애들이랑 셋이 사는 건 저한테 너무 행복한 일이에요.


그 동안 연극 스탭 일, 아동극이나 다른 단기 공연들, 

학교에 예술강사로 나가 수업도 하면서 돈을 모았어요.


예술쪽 일은 꾸준하지 않은 부분이 있어서 이제 주 이틀씩은 햄버거집 아르바이트도 하고요. 너무 바빠서 

오래 못 쉬었을 땐 세 달 동안 하루도 못 쉬고 일했지만 이렇게 했기 때문에 그 와중에 애들 데리고 

베트남 여행까지 다녀 올 수 있었어요.

처음 연기를 시작하면서는 

엄청난 명성을 가진 스타를 꿈꿨어요.


지금도 돈보다는 명성을 중요하게 여기기는 해요. 명성이 있어야 돈도 따라온다는 생각을 기본적으로 가지고 있었거든요. 그래서 예전에는 지금처럼 스탭 일 같은 걸 하리라곤 생각도 못했어요. 20살 때 극단에서 

오퍼레이터 역할을 하라는 얘기를 들었던 적이 있었는데, 그때 울었어요. 나는 배우인데 왜 스탭을 하라고 

하느냐면서 선배들 앞에서 건방지게 엄청 울었죠. “저 싸가지 없는 거” 하면서 안 시켰거든요? 

지금에 와서 생각하면 스탭 일을 배우면서 오히려 시야가 더 넓어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배우로서도 더 성장했고요. 

제 능력치가 올라가고 있는 걸 눈으로 

볼 수 있게 돼서 요즘 참 즐거워요.


처음 생각했던 거랑은 많이 다른 길로 가고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나 자신의 능력이 성장하는 걸 느낄 때가 즐겁잖아요? 통장 내역으로도 알 수 있고, 어딘가에서 날 많이 불러주기 시작할 때 또 느낄 수 있고요. 

활동을 함께할 팀원이 생기고 스스로도 창작을 할 수 있게 된 것도 예전에는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어요. 

지금은 제 손으로 무언가를 쓰고, 전시도 만들면서 길은 다르지만 어쩌면 같은 끝을 향해 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해요.



지금의 목표는 배우로서 활동을 늘려가는 거예요. 


연극은 1년에 한두 작품씩은 꾸준하게 하고 있었지만 조금 더 명성이 있는 배우가 되려고 한다면 매체 

연기자로 더 많이 활동해야 할 것 같아요. 이번에 광고 촬영을 두 번 했어요. 그 중에 하나가 경기도 기회소득 

정책의 캠페인 광고였어요. 예전에 함께했던 무용극단을 통해 들어온 일이었죠. 그 극단이 운영 형태를 

약간 에이전시 쪽으로 바꾸면서 그런 광고 촬영 일도 받게 된 거였어요. 그러면서 소속 배우들 프로필을 냈더니 혹시 다른 배우 없냐고 하길래 대표님이 제 걸 냈다가 이 배우가 마음에 든다, 이렇게 된 거예요. 

광고가 나가고 나서 지인들로부터 연락을 정말 많이 받았어요. 버스에도 붙어 있고 하니까 여기저기서 

저를 봤다며 연락해오고, 아이들도 엄마가 TV에 나온다며 좋아하고, 네이버에서 검색해서 자기 친구들 

보여주더라고요. 이런 일들에서 뿌듯함도 느꼈고 영상을 하기는 해야겠구나 싶었어요. 

그래서 내년부터는 영상 연기 쪽을 더 많이 두드려볼 계획입니다. 

워킹맘들이 모두 같겠지만 아이들에 대한 

부분이 정말 쉽지 않아, 지원이 필요하다고 느껴요. 


큰애 같은 경우는 돌봄교실이 없고 ‘늘품’이랑 학교에서 하는 또다른 사회지원 프로그램이 있거든요. 그런데 

방학 때 저희 아이 1명만 신청을 했다는 거예요. 저희 동네가 일하는 엄마가 별로 없는 동네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다 보니 아이도 혼자 가서 선생님이랑만 시간을 보내야 하니 가기 싫고, 학교 측에서도 저한테 전화가 

와서는 한 명인데 진짜 보내실 거냐고 묻는 거죠. 이렇게 되니까 저도 기분이 조금 상하기도 하고, 보냈다가 

아이한테 무슨 불이익이라도 있을까봐 보내지 않는다고 하게 됐어요. 어쩔 수 없이 학원만 두 개 정도를 

두 아이를 보내려니 부담이 많이 커요. 서울쪽은 예술인 돌봄지원이 있다고 들었는데 인천은 없어서 

이런 부분이 힘들어요. 

저는 일단 아이들이 첫 번째예요. 


애들이랑 작은 창작들을 하는 것도 즐겁고 엄마를 멋있어해주는 것도 너무 좋아요. 캠페인 광고 찍었을 때도 

그랬고, 동네 어머니들이 대부분 나이대가 더 있으신 편이어서 그런지 학교에 가면 애들 친구들이 너네 엄마 

예쁘다고 해주는 게 애들이 많이 뿌듯한가 봐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이 항상 저에게는 가장 힘이 돼요. 

그리고 예술을 할 때가 마음이 가장 편해요. 

팀원들이랑 뮤지컬 만들던 일이 중단되면서 사실 휴식의 시간이 생겼었는데, 그때 뭘 안 하니까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기 시작하는 거예요. 가둬놓으면 좀 병 나는 스타일이라서요. 누군가에게 인정받는 걸 중요하게 생각하기도 해요. 그때 큰애랑 동화책 쓰기를 하기 시작하니 바로 환기가 되는 걸 느꼈어요. 

배우 생활을 하다가도 관객들이 저 배우 잘하던데 하며 얘기하는 소릴 듣는다든지, 또 조명이든 기획이든 

어디선가 일을 해서 잘했다는 말 들을 때가 좋아요. 


미래의 나 자신에게.


고생한 만큼 돌아왔구나. 혼자서 버티고 또 버티니까 그래도 그만큼은 살아낸 거야. 


2024년의 나는 개인적으로도, 그리고 집안에도 너무나 힘든 시간이 많았어. 하지만 좋은 사람들이 주위에 정말 많더라. 안좋은 소식이 있으면 항상 열 명, 백 명씩 연락이 와서 위로해 주고 도와주겠다고 해. 환경이 쉽지 않은데도 나를 버틸 수 있게 해주는 사람들이 많아. 

그래서 이제는 무슨 일이 있어도 또 버텨내라고 그러나보다 하면서 열심히 살고 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