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서울 인터뷰

💬 2024 INTERVIEW  |  김재연

"하지만 결국은 

내가 선택한 거라는 생각이에요."

항상 자연에 관심이 많았어요. 


씨앗 같은 걸 모으는 취미도 있었는데 이렇게 모아 둔 씨앗들은 필름 카메라 스캔을 할 때 같이 올려 놓고 

특별한 효과를 얻기도 해요. 저는 엄마랑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는 편인데, 엄마는 농학을 전공하셨어요. 

7남매 중 막내셨는데 굉장히 사랑을 많이 받고 자라셔서 뭐든 발견하면 “너무 아름답다!” 하시며 

즐거워하시는 분이에요. 저도 그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결혼 직전에 동네 산이 계속 개발되는 걸 보면서 그 현장을 찍은 작업이에요. 이 산에 갔을 때 제일 컸던 게 

땅을 파고 울리는 소리가 두두두두 하면서 이렇게 픽셀이 깨진 것 같은 이미지가 떠올랐어요. 

디지털 합성과 아날로그 방식으로 이미지를 깨뜨리는 방식으로 작업했죠. 회화에 대한 동경심이 있어요. 

사진을 백 번을 찍어도 손으로 그려내는 걸 이길 수 없는 느낌이 들 때가 있거든요. 

우연히 땅에 떨어진 작은 열매 같은 걸 

보면 모양이 너무 다 달라요.


쪼그라든 것도 있고 그런 것들이 지금 제 자신의 

모호함, 알 수 없는 세계 같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뒤에 배경을 사진으로 놓고 이미지를 쌓아올리는 느낌으로 작업했어요. 아이를 낳은 지 얼마 안됐을 때 했던 작업이라서, 외부 자연보다는 저 자신의 

세계를 들여다보던 시선이 있어요.

어릴 땐 어른들이 열심히 하라는 것들 

다 열심히 하던 모범생이었어요.


그러다 고등학교 때 우연히 사진 동아리에 들어가게 됐죠. 원래는 천문학 동아리를 들어가고 싶었는데 

모집이 빨리 마감돼서 관심이 있었던 동아리 중 인원이 남았던 동아리에 가입한 거였어요. 

그렇게 접한 사진으로부터 굉장한 카타르시스를 느꼈어요. 내성적인 성격의 제가 사진을 찍는 

그 순간만큼은 용기를 내게 되었고, 사진에 애정을 갖게 됐죠. 


동아리 활동을 하다 보니 카메라도 사고, 필름 카메라도 사게 됐어요. 엄마가 20대 때 사진을 취미로 하셨다보니 흔쾌히 카메라나 필름을 살 수 있도록 해 주셨던 거죠. 부모님도 지원해주시겠다, 이렇게 즐거운 일 평생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지금 제가 사는 곳은 수도권이지만 힘들 때 

도움을 받거나 작업의 자양분이 되어줄 사람들이 

필요할 땐 사실 대전에 있는 사람들을 많이 찾아요.


대학 공부를 마치고 본가가 있는 대전에서 지내면서 ‘청춘다락’이라는 공간을 작업실로 쓰게 됐어요. 거기서 

다양한 예술가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그 중에 특히 디자인하는 친구와는 지금도 함께 작업하고 있고요.


서울에 머물지 않았던 건 서울에서 사는 게 너무 팍팍해서였어요. 상대적으로 경제활동을 훨씬 더 많이 해야 

월세도 내고 먹고 사는 것도 해결이 됐었거든요. 대전에 내려가면서는 지역에서 작업을 잘 이어갈 수 있을까 

걱정했지만 지금에 와선 가족들 곁에서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보낼 수 있었던 것도 좋았고 지역에서 

만난 동료들 덕분에 잘 한 결정이었다고 생각해요.


그러다 대학 동기였던 남편과 2019년에 결혼을 하게 되면서 경기도 고양시에 거처를 잡게 됐어요.

결혼하고 얼마 안 돼서 아이가 생긴 걸 알았어요.


결혼을 빨리 한 건 아닌데, 아이를 빨리 낳아서 애기가 지금 5살이에요. 결혼을 한다는 생각도 막연히 있었고 

어릴 때부터 아이는 좀 낳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기 때문에 크게 복잡하게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아요. 

하지만 아이를 낳고 1, 2년 간은 많이 힘들었어요. 그 기간 동안 시간을 얼마나 자유롭게 쓸 수 없는지 몰랐죠. 제가 에너지 레벨이 높은 사람이 아니라서 집에 있을 땐 누워 있고 쉬고 싶은데, 그런 게 전혀 안 되는 거예요. 


저는 예술가 치고는 규칙적인 패턴으로 사는 편이기도 하고 크게 우울함이라는 것 없이 살았는데 아이가 생기면서 지켜야 할 대상이 생기고, 오로지 저만 지키고 살았던 때엔 생각도 하지 못했던 것들을 생각하게 됐어요. 우울감에 잠기는 시간도 있었고요. 반대로 그래서 더 사진 작업을 이어가야겠다는 의지도 생겼던 것 같아요. 

출산 직후에도 다양한 공모에 지원했어요.


아이가 한두 살일 때도 누워있다 싶으면 막 쓰고, 잠들면 또 쓰고 하면서요. 그때는 제가 뭐 하고 있으면 아이가 다 가져가서 그냥 물고 찢고 할 때였어요. 지금은 어떻게 그 와중에 공모를 쓰고 냈지 싶어요. 

경력 단절에 대한 두려움이 컸던 것 같아요. 사람들이 툭툭 하는 말에도 영향을 받았고요.

아이를 낳고 내 삶에 변화가 생겼으니, 

사실은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게 맞잖아요?


임신 중에 개인전을 하게 됐는데, 그때 왔던 선배 한 분은 아이 낳고 나서 아기 사진은 찍지 말라고도 하셨어요. 주변 선배들 중에는 예전부터 대놓고 “아이 낳으면 너, 작업 못 한다.” 얘기하는 경우도 있었고요. 그렇게 안 된다, 안 된다 하는 것들이 스스로에게 주입이 돼서 한동안은 아이와 관련한 작업은 금기시하기도 했어요.


여성 작가들이 결혼한 후에 육아의 일상에 너무 빠져 버리면 작업에서 객관화해야 하는 부분을 놓칠 수도 있는 것 같아요. 하지만 예술계가 유독 출산과 육아에 보수적인 면이 있다고도 생각합니다. 그래서 요즘은 일부러 드러내고 더 얘기하려고 해요. “지금 아이를 키우면서 작업하고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있다는 걸 알아야 

후배들도 이러한 길로 올 수가 있고, 또 세상도 조금씩 바뀌지 않을까 생각해요. 

내가 잘못한 일도, 움츠러들어야 할 일도 아니니까요. 

성북동의 ‘유영공간’에서 2022년에 

작가 공모를 했었어요.


공간이랑 기획까지 전체 지원해주는 사업이라 경쟁이 치열한데 감사하게도 연락이 왔죠. 1년 정도를 매달 

미팅하면서 준비했어요. 유영공간 기획자 분들의 도움으로 2023년 1월에 세 번째 개인전 <혼혼한 공기>를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어느 날 밤 하늘을 찍었는데 완전히 어둡게, 

이렇게 블랙으로 나오는 거예요.


그런데 그게 좋았어요. 사진을 처음 배울 때 배웠던 대로라면 실패한 사진인데 어느 순간 그게 좋다고 느껴져서 의도적으로 실패한 사진을 만들었어요.

정답이란 게 없는 예술에 왜 정답이 있는 것 

같을까 하는 비관적인 의문을 담았죠.


빛이 잘 보이지 않는 해 지기 직전, 아주 얕은 정도의 빛만 있는 그때 사진을 찍어서 그 위에 무너지고 쌓인 일과 같은 맥락을 담아 먼지처럼 생긴 작은 식물들을 쌓아 올렸어요. ‘실패한 어둠’이라는, 지금도 계속 하고 있는 

작업이에요. 


그냥 사진,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를 깨고 싶은 것도 있고 검색을 해 봐서 남들이 했다 싶은 건 잘 안 하는 것 

같아요. 겹치는 게 워낙 많아서요. 매체 특성 상, 너무 비슷한 게 많아서 더 회화 작업을 많이 보는 것 같아요. 

회화는 아무리 따라하려고 해도 결과물이 다른 방향으로 나오거든요.

예술인 지원 제도가 많아졌으면 좋겠어요.


‘경기도 예술인 기회소득’ 제도처럼요. 고양시는 아예 안 하거든요. 물론 큰 돈이 들어가는 사업이긴 하지만 일상에서 작업을 해나가는 예술인들에게 필요한 부분인 것 같아요. 내가 어떤 재료를 써보고 싶은데 너무 비싸네 하고 포기하는 순간이 생길 때가 있으니까요.


한 번은 경기도 예술인 기회소득 지원하는 담당처에 전화를 해서 고양시는 왜 포함이 되지 않느냐 물었어요. 담당자 분은 시를 설득해야 하는 일인데 고양시가 정책적으로 청년 모두에게 보편적 복지를 추구하는 방향성을 갖고 있어서 설득이 어려운 상황이라고 하시더라고요. 파주나 의정부는 ‘예술도시’가 되면서 지원금도 많이 주고 하는데 고양시는 이런 부분에 다소 폐쇄적이어서 지금은 고양시 말고 인천이라든지 예술인 지원 정책이 더 활발하게 이뤄지는 곳으로 거처를 잡을걸 싶기도 해요.

하지만 결국은 내가 선택한 거라는 생각이에요.


얼마 전에 만난 한 친구도 “나는 너 결혼하면 사진 안할 줄 알았는데...” 하는 얘길 했었어요. 그래서 더 악착같이 하는 거죠.


아이가 태어나면 나한테 돈을 쓰는 게 쉽지 않게 되니까요. 월 10만원이라도 지원이 들어와서 그 돈으로 재료라도 사보고 하면 작업이 이어질 수 있는데 그걸 못하면 감각이 뚝 떨어져요. 그 떨어진 감각을 끌어올리기가 참 힘들었어요. 그 이후로는 하루에 30분이라도 최대한 꾸준하게 사진 작업을 하려고 해요. 주말에는 전시도 보고, 인스타그램도 열심히 찾아 보면서 어떤 흐름이 있고 어떤 작업을 하는 사람들이 좋은 반응을 얻는지 챙겨보고 있죠.

처음 사진을 하면서는 연예인들 촬영하는 작가, 

올해의 작가상 받는 그런 사진 작가들이 막연히 멋있어 보였어요. 


나도 저렇게 되면 좋겠다 생각하기도 했죠. 사진의 분야도 지금 하고 있는 순수예술보다는 광고 같은 쪽을 지망했어요.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서 보니 감각적으로 사진을 잘 찍는 친구들이 너무 많았어요. 그건 타고난 재능의 영역인 것 같았죠. 저는 그렇게 타고난 감각은 없는 사람이라고 생각했어요. 


그러면서 그때 하던 다큐멘터리 동아리 활동으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어요. 학교 등록금 시위 현장도 가보고, 4대강 사업이 진행중일 때는 농민분들과 만나 친하게 지내며 두물머리 쪽도 자주 갔어요. 사회운동에 관심이 많아서라기보다 그 활동을 하면서 그냥 땅이 있는 곳에 가서 파 보고, 몸을 쓰던 그런 시간이 좋았던 것 같아요. 내가 1년간 키운 무언가를 수확하는 기쁨도 그때 느꼈어요. 새로운 시야가 생겼다고 할까요? 땅에서 자라나는 것들, 농민들의 일하는 모습, 매일매일 성실하게 살아간다는 것에서 아름다움을 느끼게 됐어요. 

지금의 나는 이런 예술가의 모습을 꿈꿔요.


누군가 내 작업이 좋아서 나를 만나게 돼도 크게 깨지는 게 없는 작가가 되고 싶어요. 상을 받기도 하고, 소위 잘 나간다는 작가들이 불미스러운 이슈에 휘말려서 큰 문제가 되는 경우를 종종 봐요. 사람이 먼저 돼야 된다는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됐어요.


그래서 지금은 저 자신이 바르게 살면서 제 아이도 잘 자랄 수 있도록 하고, 작업도 꾸준히 하는 작가의 모습을 그리고 있어요. 저 자신이 지치지 않고 욕심내지 않는 게 중요하겠죠.



미래의 나 자신에게.


나의 지금은 매일이 전쟁같은 하루하루야. 하지만 난관 속에서 행복이 싹트는 거서 같아. 아이가 크는 이 전쟁통 속의 행복이 또 있더라. 너는 어쩌면 이런 걸 그리워하고 있을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네가 옛날 어른들 말처럼 ‘그때가 제일 좋을 때였어.” 하고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해. 지금의 나는 지금의 최선을 다하고 있으니까. 

너는 너대로 나이가 든 만큼 나보다 자유롭고 여유있게 사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어.